안희연 시인 / 고트호브에서 온 편지
나는 핏기가 남아 있는 도마와 반대편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오늘은 발목이 부러진 새들을 주워 꽃다발을 만들었지요
벌겋고 물컹한 얼굴들 뻐끔거리는 이 어린 것들을 좀 보세요 은밀해지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지 나의 화분은 치사량의 그늘을 머금고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창밖엔 지겹도록 눈이 옵니다
나는 벽난로 속에 마른 장작을 넣다 말고 새하얀 몰락에 대해 생각해요 호수, 발자국, 목소리…… 지붕 없는 것들은 모조리 파묻혔는데 장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 담장이 필요한 걸까요 초대하지 않은 편지만이 문을 두드려요
빈 액자를 걸어두고 기다려보는 거예요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물고기의 비늘을 긁어 담아놓은 유리병 속에 새벽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별들은 밤새도록 곤두박질치는 장면을 상연 중입니다
무릎을 켜면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당신이 이 편지를 받을 즈음엔 나는 샛노란 국자를 들고 죽은 새의 무덤을 휘젓고 있겠지요
* 고트호브: 그린란드의 수도로 ‘바람직한 희망’이라는 뜻.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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