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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은우 시인 / 오후의 문장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4.

김은우 시인 / 오후의 문장

 

 

붉은 장미가 담벼락에 긴 팔을 뻗어

햇살을 잡아당기는 동안

 

공중에 내던져지는 돌멩이처럼

어디에서 멈춰야할지 알 수 없는

어리둥절한 시간이 오고

 

멀리 가는 기차

멀리 가는 새

멀리 가는 구름

멀리 가는 당신들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는

오후 세 시의 햇살은 독립적이다

 

가장 멀리 가는 길을 찾는

내 몸은 점점 길어지고

목이 마르고

누군가 내 몸을 조금씩 잘라내는 오후

 

한 시간 씩 이백년 전에 죽은 사람을 생각하고

한 시간 씩 무인도에 갈 가방을 챙기고

한 시간 씩 머리를 감고도 남은 시간

엎드려 낮잠을 잘 때

 

어디선가 오래된 연인들이 헤어지고

어디선가 새로운 연인들이 생겨나고

 

 


 

 

김은우 시인 / 물고기의 진화

 

 

길달리기새의 발바닥을

씻겨주다 보았다

 

물고기가 나무에 오르는 걸

 

물고기는 쉽게 미끄러지거나

시들지 않는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유영하는

시선과 어긋난 방향으로

치솟다 추락하기를 반복하는

 

물고기는 아가미가 아닌

배지느러미로 숨을 쉬었다

 

자전거의 은빛바퀴처럼 돌고 도는

시간을 따라 나뭇잎이 떨어지듯

비늘이 우수수 떨어져내린다

 

바람이 멈추지 않는다면 아마도

죽은 물고기들이 땅을 덮을 것이다

 

반짝이는 해변의 발자국들과

먼 바다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지는

물고기가 나무의 안과 밖을 휩싸는

공중에 비린내가 가득하다

 

나뭇가지를 흔들자

포도송이처럼 매달린 물고기가

새처럼 멀리 날아갔다

 

- 2014년 <시와 사람> 겨울호

 

 


 

김은우 시인

광주에서 출생. 1999년 《시와 사람》으로 등단. 시집으로 『바람도서관』과 『길달리기새의 발바닥을 씻겨주다 보았다』가 있음. 2015년 전남문화예술재단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