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진영심 시인 / 재와 보석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4.

진영심 시인 / 재와 보석

 

 

눈썹 아래 흘러내린 무망을 그만 잊고 싶은 눈동자,

겨우 당신 눈 속에 차올랐는데 문득 스미지 않는 마음,

장미 돋친 가시이다

 

이런 때 진정 갖고픈 터전은 레이캬비크에서 시작하는 황금고리 해안선

우리의 생애를 애써 눈여겨 바라보지 않는 곳

 

침묵을 비 맞듯 우두커니 서서 통째로 씹는 말들과

풀을 온종일 언어처럼 먹어치우는 양들과

표정을 꽉 다문 바다쇠오리 퍼핀들이 가득한 곳이니까

 

몸통을 꺾는 비바람이 불어온다, 틈만 만나면. 디르홀레이 해안가 파도에 꺾인

코끼리 바위형상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모른다 시간을 오래 품어도 썩지 않는 것

비바람 사이로 확 번져오는 감정의 풍경 위로

순전해서 높아서 녹지 않던 만년설들 무언가(無言歌)를 견디지 못해

빙산 되어 녹는다 요쿠살론 유빙들

옥빛으로 푸른 얼음 덩어리들 너울져 간다 가만가만 바닷물 위로

깨진 마음들, 아파서 품어야 할 보석들, 비췻빛 이야기들

 

내부에서 마그마 끊임없이 끓어오른다 뿜어져 나오는 유황가스,

터지는 화산, 흐르는 용암 너무도 뜨거워 굳어버린다

굳은 기암괴석, 가슴의 황야

괴괴한 이끼 들판의 신경들, 부글거리다 치솟는 간헐천 이마들

햇빛에 마르지 않아, 비에 씻기지 않아 열기 뿜으며

재로 남은 이야기들

 

아이슬란드의 앞과 뒤, 재와 보석으로 한 몸이어서

비로소 당신이 스밀 것 같은, 더 이상 나뉘지 않는

 

 


 

 

진영심 시인 / 벽

 

 

한 번도 표정을 드러낸 적이 없어요 늘 서성거리죠

유리창이나 방문을 담보하기에 방향을 탐내지 않아요

세상을 엿보는 일은 밖에 일이니까요

 

모서리와 모서리로 만나도 날카롭지 않아요 만나야 비로소 직립하니까요

나를 감싼 벽지와 인조대리석은 비밀을 발설하지 않아요

비밀은 차갑다가 뜨거워지는 알몸 시멘트 같은 것이니까요

 

당신은 시계소리와 한숨, 웃음소릴 모아 차곡차곡 채워도 부풀지 않아요

식탁과 침대와 소파와 어울려 구도를 잡아도 소실점이 없어요

나 혼자 흰 가재미와 흰 밥을 먹을 때 고요로 어루만져주죠

 

시시한 걱정과 어이없는 행동과 어쭙잖은 이력이 만든

나의 구불구불한 곡선을 반듯하게 펴주기도 하죠

그렇게 반듯해지다가

정직한 당신 몸을 뚫고 내다버릴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해봐요

피아노나 시집, 수학책이나 꽃기린, 연필과 지도 같은 것들

 

갇힌 절망조차 당신이 건넨 호의겠지만

금가면서도 넘어지지 않았어요

그걸 보며 견뎠지요

 

막혀버린 당신 안에 관(管)을 뚫기도 했어요

당신 안의 내가, 내 안의 나와 비로소 만나려고요

 

삐죽하게 물이 새는, 길 잃은 신발처럼

끊임없이 당신 안을 엿보던

당신을 통과하지 못한 햇빛이나 바람이 모여 서러워할 때

언제나 당신 안에 있는 것들은

칸과 칸으로 안도하는 서식(棲息)처에 대해 노래해요

 

 


 

 

진영심 시인 / 응급실의 밤

 

 

 배에 가로막이 걸쳐있는 것 같구나 노모에게서 전화가 오고 공중을 거스르지 못한 톱니의 비가 온다 응급실 문을 열면 반대편 본관으로 향하는 또 하나 문이 있다 그 문을 누군가는 기억하고 누군가는 잠깐 잊는다 병실 안 쪽 눈을 들면 일인용 병상만이 사방에 벽을 대고 있다 일인용에서 칸을 더 넓힐 수 없다 아무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오직 단독자로 있다 한 움큼 들숨과 날숨의 간절함으로 다시 숨이 차오르기 위한 안간힘으로

 

 링거 폴대들 휴전의 깃발처럼 서 있다 아이는 아이끼리 노인은 노인끼리 서로에게 투명 울타리를 조금씩 두르고 있다 콧줄만이 양식인 구십 노인, 코골이를 관 속에 가둔 듯 조용하다 어제보다 더 굽은 등을 업은 노모, 화장실 문턱에서 폴대를 넘기지 못한다 그렇다고 휘청이는 당신, 등에 대고 손사래 치지 않는다

 

 바위처럼 육신을 공중에 매달아 지상에 패대기치는 시간들이 머문다 감각할 수 없는 전신이 비애로 흥건하다 평안한 피가 지혈된다 붕대로 온몸 친친 동여맨 늙은 아버지 얼굴 위로 눈물이 제 몸 풀어 세상을 달구는, 잔해의 아슬한 공간

 

 정적이 불안한 순간 구급대에 실려 온, 이곳과 저곳을 따질 수 없는, 노인 다리 위 30센티 넘게 부푼 배가 거세게 출렁인다 출구를 찾을 수 없어 흘러나오지 못한 것들은 압력이 되었다 석션! 한가운데 중환자구역 커튼이 쳐지고 숨구멍 세우는 가쁜 손들은 보이지 않는다 커튼 사이 축 처진 주름진 손 하나 미동조차 없다 중단과 결말 사이 저 노인이 진정 만지고 싶었을 얼굴은 듣고 싶었을 목소리는 이제 없다 아버지가 그랬듯이. 침상 주변 찢긴 상처나 통증들이 입 다물 때 커튼이 걷히고 본관 쪽 문이 열린다 희디 흰 布 하나가 사라진다 구급대원은 공중에 펼쳐진 흰 포를 놓치고서 뒷모습 같은 얼굴로 서 있다

 

 이곳에서 으스러진 육신 너머 으깨어지지 않는 고통 너머, 돌아오지 않는 의식을 이어붙이는 자들의 손이, 나무 상처 안에서 자라는 차가버섯으로 늘려질 때, 장갑 안 가득하던 핏물을 聖水로 바꿀 때, 응급실 밖 밤비가 거스르지 못한 톱니의 공기는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진영심 시인 / 등

 

 

 그곳은 나만 알고 당신은 모르는 배후입니다 당신의 온몸에게 눈동자는 절대로 미치지 못하는, 빗물은 볼 수 없고 빗소리만 들리는 그곳은 슬픔의 최대면적입니다

 

 그곳을 보고 싶은 가슴에게 백팔십도란 얼마나 쓸쓸한 반경일까요 반경 뒤쪽은 반경 앞쪽으로 늘 가보고 싶어합니다

 

 붉은 보리수 열매로 가득하고 노래하는 첫 구절을 만질 수 있고 햇살이 내려앉는 반경 앞쪽으로

 

 어깻죽지 틈에서 솟는 진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등을 돌리고만 수많은 앞쪽, 온 존재로 등에 업어보고 싶었으나 사라진 피붙이들 그리운 목숨 낯익은 냄새와 얼굴, 등에 남아 소리조차 아득합니다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이라서 무심했던가요 분첩으로도 가리지 못하는 당신의 배후는 정직합니다

 

 정언명령을 해제한 신부의 정복 같지요 지켜야 할 고귀한 말씀도 눈물도 웃음도 붙이지 아니합니다 그저 그림자처럼 연하거나 진할 따름입니다

 

 누군가 선사한 천연의 솔기로 만든 절벽을 짊어지고 등뼈 하나로 꿋꿋하지요 가끔씩 뒤쪽 한복판에 누군가 꽂아놓은 화살, 뽑아내지 못하면 휘청거리던가요 생애가 구부정해지던가요

 

 가시 돋친 채 기도를 업고 돌아선 표정으로 그 물결로 파도치던가요

 

 


 

 

진영심 시인 / 딸기가 언제 무르는지

 

 

딸기로부터 언제 무르는지 들을 수 없었어요

그것의 혀가 말하는 것을 알 수 없었어요 살빛 가시돌기들로 숨기는 것들을

 

제때를 놓친 채 보낸 시간이

햇빛으로 명랑하게 익어갔던 순간을 질투한다고 느끼지 못했어요

 

더 단단하고 더 붉고 향기로웠던 순간

어린 고양이 발톱 같은

강단 있던 순간을 믿었어요

시간을 따라가도 꼭지에 난 잔털은 늘 가슬가슬했으니까요

 

다디단 홍시처럼 익어가기에 마음은 너무 얇았나요

과육은 갈라지고 흰 뼈를 드러내며 모양을 잃었어요

 

한 입 물면 빨간 즙 가득 이해로 가득 차오르도록

울컥 잠기는 목울대를 따뜻하게 적셔주도록

 

검은 돌기가시를 붙잡고 어둠으로 뭉개지는 걸 눈여겨본다 해도

물컹해지는 곳 잘라내고 가슴의 냉장고 여는 시간을 늘린다 해도

 

시름에 겨워 과육의 희고도 붉은 경계가 희미해지던

목마름에 답하지 않은 시간을 뚫어지게 볼 수 있었을까요

 

옆자리에서 옆자리임을 잊고

몰래 한숨을 길게 몰아쉬는

도레미에서 갑자기 라시도로 치닫는

밤사이 돌들 늑골 사이로 자라나는

 

슬픈 시간으로 가는 길에 찍히는 내력을

 

딸기에게서 언제 무르는지를

들을 수 있었을까요

 

 


 

진영심 시인

전북 완주 출생. 전북대학교 대학원 영문과 석사 졸업. 2019년 《시현실》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