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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미현 시인 / 떨어진 별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4.

황미현 시인 / 떨어진 별

 

 

지구에 얽힌 실선들, 가만히 보면

모두 휘어진 모양입니다

자연스레 휘어진 모양의 국경선은

인습적이거나 아름답습니다

 

가령,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지구의 실선들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고정으로 머물러 있었다는

그래서 누군가 지구본을 돌리듯

지구를 힘껏 돌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휘어지거나 삐뚤삐뚤한 국경들

다시 그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라는.

그중 별을 국기의 상징으로 쓰는 나라들은

어디서 그 별을 주웠을까요

단출하게 하나만 주워 왔거나

아니면 여러 개의 별들을 일렬로

늘어 놓거나 반원으로 둘러 놓은

하얀 별, 또는 노란 별, 빨강 별

사실 하늘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주워왔을 수도 있습니다

 

떨어진 별들이 모인 국기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습니다

별들은 저토록 유연한 것입니다

 

 


 

 

황미현 시인 / 어쩔 수 없는 짝수

 

 

어젯밤엔 둥근 지구 밖에서

구르지 않는 꿈을 꾸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이 한 마리 새처럼 내려앉고

깃털과 뼈를 모두 버리고 사라지는 꿈

둥근 것들에게도 양쪽이 있다는 것을 뒤척이다 알았다

모든 숨결은 짝수와 홀수로 견디다 그 중 하나를

택해 사라진다는 것도 잠결에서 들었다

 

최초의 셈법은 홀수에서 시작 되었을 것. 홀수로 자전하고 공전한다

전 자와 후자들은 짝수에게 버림받은 것들

하나의 몸짓으로 나비의 양 날개와 뱀의 두 갈래 혀 날개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새들은 홀수의 열매들로 배를 채운다

 

죽은 새를 뒤적이다 본 뼈는

홀수까지 세다 말았다

그렇다면 은륜의 중심에 뜨는 달의 뼈는 어떨까

몸이 둥근 것들도 자주 넘어지는 걸 보면

어느 방향에 기우뚱 기우는 홀수가 있다는 뜻일까

 

한 밤의 고양이 울음소리는

홀수인 것이 분명하다

 

 


 

 

황미현 시인 / 파란 맛

 

 

알지? 파란 맛이란

도달점에 못 미치는 맛이라는 거

그때 얼굴을 찡그리며,

신맛을 떨쳐 내려 흔든다는 것도 알고 있지

 

온 얼굴을 짜내며 버리려는 맛

 

햇살이 만찬중인 파란색에 곁들여 먹었던 그늘은 싫증났고 모르는 사이 야금야금 뜯어먹었던 파란 맛은 여전히 그립다

 

과일들과 채소들이 입안에 고이는, 파란 이름들처럼 멀어진 시간 같은 파란 맛. 파란색으로 물들고 싶을 때 원피스 단추들마다 비밀번호를 풀고 기다릴 때 파란은 어느 호수의 수면을 떨치고 덮쳐 올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기억해보니 혀들이 온통 파란색일 때가 있다

 

즉석의 말들로도 깔깔거리던 파란 혀, 그러면 그렇지, 라는 말도 파란의 시절엔 몰랐던 말, 어쨌거나 파란은 너무 멀어진 맛

 

숫자들이 나도 모르게 풀려나간 맛. 그러니까. 여전히 그리운 파란을 손가락 빨개지도록 만지고 싶지만 채소밭들은 끝이 났고 문턱 높아진 파란은 과거형의 말들만 모아놓고 있다

 

여전히 맛있게 건재하다는 말에 혀를 대본다

껍질 맛이 난다

 

 


 

황미현 시인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2019년 《시작》 신인상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