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점미 시인 / 행복한 도서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4.

김점미 시인 / 행복한 도서관

 

 

문을 열면 연분홍 꽃잎 머금고 걸어오는 푸른 바다

봄 햇살이 꿈의 책장을 넘기면

신록의 아이들, 재잘거리던 입 감추고

조용히 서가에 둘러앉아

출렁출렁 사람의 바다를 유영하고

 

서 있는 사람, 앉아 있는 사람, 누워있는 사람, 말쑥한 사람, 지저분한 사람,

동그란 얼굴, 길쭉한 얼굴, 웃는 얼굴, 찡그린 얼굴, 화난 얼굴, 행복한 얼굴…

개성도 생각도 다양하여 누구도 소홀하지 못하는 방에서

 

각기 다른 가방 꾸리며 떠나는 여행지

여기는 세상 한켠이면서 세상 전부이고

동양이면서 서양이고

오늘이면서 내일이고

현재이면서 과거이고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모여

나른한 오후의 담소 즐기는

 

실명의 고통으로 쓴 축복의 시*를

재잘거리던 아이들은 느꼈을까,

아픔이면서 희망이고

지면서 다시 피는

이 방의 주인인 빛나는 저 아이들의

행복한 바닷가 도서관에서

 

* 「축복의 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시.

 

시집『오늘은 눈이 내리는 저녁이야』(산지니, 2021) 중에서

 

 


 

 

김점미 시인 / 통화

 

 

이것은 책임에 정지된 듯한 느낌이 싫어서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다

아름다운 언어의 정지, 만남의 한계가 만들어내는 그리움의 정지,

온통 정지된 세계 속에서 정지되지 않은 채 산다는 것은

차라리 가학적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나의 정지를 일깨우곤 하지만,

나는 차라리 고여 있던 시간의 정지를 기억한다

詩가 칼을 품고 죽어버린 날의, 내 젊음의,

정지를 기억한다

누가 정지되지 않은 채 살아가는가?

나는 정지됨을 잊기 위하여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데

나의 정지됨을 보기 위하여

오늘도 나에게 전화를 거는 그는,

그는 누구인가......

 

 


 

 

김점미 시인 / 라이브 콘서트

 

 

 음악회에 갔다 문을 열면 내 방에서처럼 노래가 흘러넘친다 스테이지 앞에서 안개가 피어오를 때 조명 빛 사이로 간간이 그대 그림자 보였다 그대 목소리에 제압당한 채 숨쉬기조차 힘들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한 곡 한 곡 노래 흐를 때마다 나는 목소리를 잃어갔다 환청이 인다는 사실은 훨씬 후에 알았다 그대의 무대에 열기가 더해 갈수록 나는 세차게 그대 속으로 흘러내렸다 겨우 머리칼 몇 올 남았을 때야 그대의 아귀에 내 몸이 녹아들고 있단 걸 알다니 그대 피할 방법 없어 세상에 나를 내다 파는 게 낫지 않을까 그대에게 물으니 그대 내 영혼 맛있게 씹으며 말한다 널 사랑해 나 너무나 놀라 황급히 문을 닫는다 스테이지 앞 안개 걷히며 조명 아래 선 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한다 내 인생의 사랑 어디에도 없는 아름다운 죽음 그대의 얼굴 뒤로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나요?

 

 


 

 

김점미 시인 / 사이버소사이어티의 거리 혹은 유혹

 

 

1. 로코코 거리

 

그 거리에 들어서면 당신은 바로 미아가 됩니다 중심에서 방사선으로 뻗은 거리의 끝은 바다로, 절벽으로, 빌딩으로, 숲으로 혹은 어둠으로 이어져 있어요 어느 한 길을 택해서 아무리 걸어도 당신은 결코 돌아오거나 도달할 수도 없어요 그러나 사람들은 빛에 속아 끊임없이 그 거리로 들어서고 결국 당신도 그 거리의 미아가 되고 싶겠지요? 원래 불가항력이 가장 멋진 유혹이니까 도발적인 당신은 가히 이 클럽에 들 자격이 충분해요 허나 꼭 알아 두세요 일단 한번 발 들여놓으면 당신의 온 마음을 그 거리에 쏟아부어야만 한다는 것, 그 어디에도 비상구는 없다는 것, 그게 가입조건이랍니다.

 

2. 보드리야르와의 악수를

 

침묵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

나는 침묵 속으로 들어간다. 나의 시뮬레이션이 나를 맞이한다. 가벼운 걸음으로 그의 세계로

우리는 웃으면서 술잔을 부딪힌다. 그는 내게 뭔가 특별한 것을 부탁한다. 나는 늘 그의 주문이 기다려진다. 그의 어둠의 세계는 확실히 특별하다. 이 방 안의 숨소리는 오래전에 잊었던 자연의 향기 같다.

그가 말한다. 현실에 취하지 말아, 13층*의 버튼을 누르고 새로운 생명의 향기를 뼛속 깊이 들이마셔, 그리고 뒤돌아보아, 결코 일렉트릭의 심도를 의심하지 말아……

 

감미로운 고통의 세계는 너의 것이다

 

창밖 거리는 얕은 비에 젖어 있다. 거리의 네온이 알록달록 내 옷을 물들인다. 천박한 몸짓으로 달려오는 거리의 차들 사이로 나의 숭고한 의식이 빨려든다. 미꾸라지처럼 날렵하게 거리를 빠져나와 새로운 침묵의 공간에 이른다. 시간. 시계를 잊어버렸어… 나의 시뮬레이션이 말한다. 시간은 너의 것이잖아, 너는 지금껏 시간을 통제해 왔고 지금도 시간은 너를 위해 작동하지, 두려워 말아, 지금 이 세상을 파괴해 버린다고 너의 시간이 멈추지는 않아, 세상을 버려, 별 볼일도 없었잖아,

맞아, 세상은 늘 녹슨 장난감들로 가득 찬 작은 상자에 불과했어, 난 그 상자들을 부숴버리고 싶었지

 

너는 어디에 있니?

좀 더 강하게 너를 전송시켜 줘

이 세상의 혼돈과 혼미한 의식을 가상세계 그 끝으로 데려다줘

세상의 냉혹을 밟고 침묵의 세계로 나를 안내해 줘

 

시궁창의 쥐새끼마냥 삶이 나를 비난한다

거리는 좀처럼 밝아지지 않는다

어둠이 지배한 세상, 그래, 나는 결코 너의 힘을 비난하지 않았어

허나 너는 빛에 이르는 나의 모든 코드를 뽑아버렸어

 

나는 그 어디에도 있지 않아

나를 내보내 줘

나의 시뮬레이션,

환상이 세상보다 낫지 않다는 걸 왜 말하지 않았어?

내가 선 이곳이 허공조차도 아니란 걸 왜 말하지 않았어?

내 손길 닿던 그녀의 살갗이 한줌 모래란 걸 왜 말하지 않았어?

넌 나를 점령하고

나를 조종하여 세상을 입력시켰어, 거짓의

거짓으로 명백한 세상 밖으로

꽃이 피고 햇살이 흐른다는 걸 몰랐을 리 없어

그래도

우리가 가야 할 길 명백한데

너도 나도 피할 수 없는 길, 그 길은

의식과 의식의 가장자리 끝에 놓인 시간,

그 단 몇 초를 통과하는 기억

태양에게 잡아먹힌 적광선 만큼의 에너지

나의 침묵 속에 갇힌

너의 우울한 환생일 뿐

그 무엇도 꿈꾸면 안 돼!

 

창문을 열면 또 다른 침묵의 창이 인도되고

어느새 피할 수 없는 침묵의 세계가 나를 삼킨다

사이버 시티의 거리에서는 결코 뒤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침묵만이 너의 삶이다.

 

* 13층 : 조셉 러스낵 감독이 1999년에 발표한 SF 영화 제목

 

 


 

 

김점미 시인 / 서점에서

 

 

단 한 번 스쳐 지난 시인의 시집을 높이 꽂힌 책꽂이에서 끄집어낸다 아주 멀리서 전송되어 온 시들이 책의 낱장에서 쏟아져 내린다 이리저리 흩어지는 활자들을 손으로 받으며 그 시인의 뇌를 먹어 치운다 30일 동안 내게로 전송되어 온 먹이를 기분 좋게 핥으며 남은 활자 무더기를 주머니에 챙겨 넣을 때 전화벨이 울린다 단 한 번 만나고도 오랜 기억의 보따리를 풀어놓던 시인은 내 몸 사이에 시를 쓰고 싶어 했다 톡탁거리는 손가락의 파도로 나를 간지럽히며 한 바다, 한 인간을 건너뛰어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두리번두리번 찾아 나서는 시인의 걸음마,

 

앗! 조심해요. 그쪽 線에는 지금 생각 바이러스 침투 중!

 

 


 

 

김점미 시인 / 변칙의 문제

 

 

눈을 감으면 당신들은 잔디가 빨갛고 제라늄 꽃이 초록임을 보게 될 것이다*.

눈을 뜨면 당신들은 푸른 잔디와 빨간 제라늄 꽃이

눈부시게 춤추며 어우러진 겨울 창가에 홀로 서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플롯머신의 숫자가 7 7 7 이라 꿈꾸며

6 6 6 의 현실에 더하기 1 1 1 하라고

오락기를 탁 탁 탁 때릴 수도 있을 것이고

태풍 전야의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바라보며

7월의 뭉게구름이 파랗게 하얀 하늘에 걸려 있으니

내일은 분명 화창한 날씨라고

애인에게 전화 걸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나 당신들의 생각일 뿐

탁상공론에 길들여진 정치가의 정책이 아닌데도

그들의 구태의연함 앞에 선 우리들은

의기양양한 패배자가 되어 귀향을 꿈꿀 것이다.

세상은 규칙을 정해놓고 규칙을 향해 저항한다.

저항의 미학이 강요하는 온갖 변칙의 문제를 둘러싸고

세상은 삶의 질을 저울질할 것이다.

그러니 당신들은

눈을 뜨고도 잔디가 빨갛고 제라늄 꽃이 초록이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 장 꼭도의 시 「갑절 노름」 중에서

 

 


 

 

김점미 시인 / 한 시간 후, 세상은

 

 

한 시간 전에 본 세상이

지금껏 봐온 참 세상이라 믿으면

이미 당신은 구세대이다

 

한 시간 전에 약속한 사람이

한 시간 후에도 그 약속을 지키리라 믿으면

이미 당신은 어리석은 자이다

 

세상은 한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 자태와 용모를 바꾸고

그 생각과 이데올로기를 바꾸고

생활 패턴과 약속들을 변경한다

 

시간은 잘게 쪼개어져

소수점 이하 초 단위로 계산되어지고

쪼개질수록 우리의 발걸음도 빨라져야 하고

계약은 신속해야 한다

빛처럼 이루어져야 기업은 살아남고,

빨리빨리 버려야만 진보될 수 있다

 

세상이 한 시간 후에도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리라 믿는 자에게

미래는 암흑이다

그러니

한 시간 전의 신뢰를

한 시간이 지나기 전에 버려야 한다

한 시간 동안

모든 진실은 소멸되고 새로이 생성되나니

이 순간 당신 눈앞의 진실만이

인류의 진실이다

고개 돌리고 나면

이미 전의 세상은 없는 시대

한 시간 후의 세상은

빛의 세계,

예측 불가한 미지의 신세계다.

 

2002년 ≪문학과 의식≫ 등단시

 

 


 

김점미 시인

부산 출생. 부산대 독어교육과 및 동대학원 졸업. 한국해양대 유럽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2년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 시집 『한 시간 후 세상은』 (2014 도서출판 북인). 부산작가회 회원, 시인축구단 글발 회원.. ‘글발’ 공동시집 『사랑을 말하다』(2005년), 『토요일이면 지구를 걷어차고 싶다』(2012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