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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진화 시인 / 꿈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4.

최진화 시인 / 꿈

 

 

시간의 천 가지 얼굴들이

만든 초배지

행여 찢어질까 숨도 못 쉬고

 

비 그치지 않는 하늘 아래

서성이는 밤

 

사라지지 않는

날것의 비린내가 새어 나올까봐

풀칠하는 손끝에 울음이 묻어나는데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나요

이렇게 오래도록 깨어나지 못할 것을

 

수만 겹 종이는 녹아서

내 살이 됩니다

당신이 허락하신 마지막 잠 속에서

 

 


 

 

최진화 시인 / 푸른 사과의 시절

 

 

오늘도 민이의 자리에는 가방만 앉아 있어요

엄마와 떨어지는 것이 무서워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지요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 같아

엄마의 치마꼬리만 붙잡고 또 가버렸어요

얼룩진 불안으로 가득 찬 하루가 시작되네요

 

내가 푸른 사과일 적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놓쳐버린 손과

땅거미 밀려오는 골목길을 헤매던 목메임과

불 꺼진 방에서 홀로 깨어나던 어둠이

소리 없이 크던 가지마다 매달려 있었지요

 

사과는 익지도 못하고

가을 없는 겨울을 맞으며 얼어갔어요

눈보라 속에서 붉은 노을을 삼키며

잘라진 시간을 이겨내는 방법을 배워갔지요

 

잊었던 푸른 사과의 시절이

나를 다시 찾아오네요

 

 


 

 

최진화 시인 / 한 접시가 되기 오분 전

 

 

비늘이 튄다 살갗을 떨어져 나온

물의 기억들이 공중으로 튄다

이제 그를 단단하게, 부드럽게

윤택하게 치장하던 날개는

비린 도마 위에 낭자하다

 

너를 향해 얼굴 붉히던 지느러미

춤을 추던 잿빛 꼬리

날선 칼끝에서 사라진다

 

피가 붉지 못한 족속들

아직도 흘리지 못하는 피를 그리워하며

다시 칼을 기다린다

펄떡이는 심장 주저앉히지도 못한 채

 

 


 

 

최진화 시인 / 북경엽서

 

 

열여섯 아들의 첫사랑이

홍역처럼 지나가고

붉은 열꽃이 뜨거워

집게에 물린 듯

내 마음도 잠시 정전되었다

 

네 넓적한 손에 내 손을 얹고

우리는 겨울이 가까운 북경으로 갔다

내 몸이 쏘옥 안길 만큼 커버린 남자여

어떻게 내 속에서 이런 네가 나왔니

 

안개로 시작하는 북경의 아침

붉은 자금성 하늘 위로 겨울 철새들 날아간다

사랑에 가슴 베인 남자여

솟구친 처마 한 끝에 그 마음 걸어두자

몇 십 번 저 철새 오고 간 후

비바람 견디어 새 살 뽀얗게 돋아 있을지

다시 와 만져 보자

 

내 처녀막을 뚫고 들어와

사랑한다는, 살고 싶다는 기쁨을 가르쳐준

최초의 남자여

네 마음 걸린 처마 옆에 그 옛날 걸어둔

한 여자의 마음

다시 또 붉게 펄럭이고 있다

 

 


 

 

최진화 시인 / 울새

 

 

새가 울어요 비 오는 풀숲에서

 

돌아오지 않는 당신을

이 비를 뚫고 오지 못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네요

 

유리병 속의 진공처럼, 집음기 속의 소리 비늘처럼

짓누르는 시간들이 창자 사이로 흘러내립니다

 

바람이 거칠어지고 풀들이 소리쳐요

떠나지 못하는 새는 젖은 날개를 파닥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찢겨진 시간을 기워가는 일

 

바늘이 지나간 자리마다 한 땀 한 땀

붉은 울음소리 맺혀 있네요

 

—시집『푸른 사과의 시절』(2013)

 

 


 

최진화 시인

경기도 동두천에서 출생. 서울교육대학교 졸업. 2005년 계간 《문학나무》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푸른 사과의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