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음 시인(문희정) / 미끄럼
빛이 내려. 빛이 눈의 육신을 빌린 거야. 그는 짐승을 보고 웃는다. 우린 생선을 나눠 먹는 사이. 둘은 눈이 닮은 것 같다. 그렇게 말해주는 걸 그가 좋아했다.
커피를 내려줄까. 고양이 울음이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인사 없이 나는 그 집을 나왔다.
빛이 그쳤는데 빛이 계속되었다. 녹아야 할 것이 녹지 않았다. 낙엽과 가래침과 아이의 웃음이 한 데 뒤엉켰다. 지치지 않았다. 더러워졌다.
눈밭 위에서 훌라후프를 돌리는 소녀와 얼어붙은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뒤지는 짐승이 있었고 나는 이곳을 빠르게 지나야 한다, 중얼거리는 사이
햇빛을 누가 이겨. 언젠가는 모든 게 그 앞에서 옷을 벗는 걸. 허스키 보이스. 허스키 노이즈. 중얼거리는 건 나밖에 없는데 넘어지지 않았는데
청바지와 손바닥에 자꾸 뭐가 묻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깥이었다. 손바닥은 돌기로 가득했다. 눈과 눈을 핥았다.
희음 시인(문희정) / 의자 이야기
의자 위에 사람이 걸터앉는다 당연하지. 아무 말 않는다 내일의 날씨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사람이 의자를 밟고 선다. 뭐지? 말은 없다. 모든 게 다 제자리에 있거든.
사람이 갑자기 의자를 걷어찬다. 또 뭐지? 가던 길 간다. 가던 길 간다.
의자만 길게 도로를 나뒹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희음 시인(문희정) / 라이프
플래시를 비춰 죽은 너에게 그림자를 지어 준다 심심하면 발끝을 틀었다 너는 나의 오후가 되었다 새벽이 되었다
시집 《치마들은 마주 본다 들추지 않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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