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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희음 시인(문희정) / 미끄럼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4.

희음 시인(문희정) / 미끄럼

 

 

  빛이 내려. 빛이 눈의 육신을 빌린 거야. 그는 짐승을 보고 웃는다.

  우린 생선을 나눠 먹는 사이.

  둘은 눈이 닮은 것 같다.

  그렇게 말해주는 걸 그가 좋아했다.

 

  커피를 내려줄까.

  고양이 울음이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인사 없이

  나는 그 집을 나왔다.

 

  빛이 그쳤는데

  빛이 계속되었다.

  녹아야 할 것이 녹지 않았다.

  낙엽과 가래침과 아이의 웃음이 한 데 뒤엉켰다. 지치지 않았다. 더러워졌다.

 

  눈밭 위에서 훌라후프를 돌리는 소녀와

  얼어붙은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뒤지는 짐승이 있었고

  나는 이곳을 빠르게 지나야 한다,

  중얼거리는 사이

 

  햇빛을 누가 이겨. 언젠가는 모든 게 그 앞에서 옷을 벗는 걸.

  허스키 보이스. 허스키 노이즈. 중얼거리는 건 나밖에 없는데 넘어지지 않았는데

 

  청바지와 손바닥에 자꾸 뭐가 묻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깥이었다.

  손바닥은 돌기로 가득했다. 눈과 눈을 핥았다.

 

 


 

 

희음 시인(문희정) / 의자 이야기

 

 

 의자 위에 사람이 걸터앉는다

 당연하지.

 아무 말 않는다

 내일의 날씨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사람이 의자를 밟고 선다.

 뭐지?

 말은 없다.

 모든 게 다 제자리에 있거든.

 

 사람이 갑자기 의자를 걷어찬다.

 또 뭐지?

 가던 길 간다.

 가던 길 간다.

 

 의자만 길게 도로를 나뒹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희음 시인(문희정) / 라이프

 

 

 플래시를 비춰

 죽은 너에게 그림자를 지어 준다

 심심하면 발끝을 틀었다

 너는 나의 오후가 되었다 새벽이 되었다

 

시집 《치마들은 마주 본다 들추지 않고》중에서

 

 


 

희음 시인

부산 출생. (문희정) 한양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2016년 《시와 반시》 상반기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 시집 『구두를 신고 불을 지폈다』 출판(공저). 시집 『치마들은 마주 본다 들추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