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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형민 시인 / 유리잔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2.

박형민 시인 / 유리잔

 

 

슬프지, 오래도록 편지를 썼어

나보다 더 목마른 유리잔을 옆에 두고

 

얼음을 넣고 물을 붓는다

 

주사위를 굴려서

주사기가 나오는 침묵

 

수많은 기포와 창조

얼음 속에 잠든 녹음

벨대가 나무 너비로 바라본 세상은 어떻습니까

 

방금

좁은 원형의 유리방에서

사람들이 얼음처럼 달그락달그락 떨고 있는 소리를 들었니?

언제 인류의 대학살이 있었지?

 

홀수였을 적 기억을 하지 못하는 짝수들

 

한 방향으로 유리잔을 돌린다

반전이 없을 거라 믿는다

물잔은 침몰의 기억을 가진다

다시는 못 올 홍수를 기억한다

 

나는 목까지 잠긴 나무처럼 파르르 떤다

원죄가 없는 나무 옆에서 약속한다

 

손마디 하나하나 끊어지는 고통 속

서로는 각자의 하늘을 바라본다

 

우리 살아서 보자

우리 죽어서 보자

 

기둥에 땀방울처럼 맺히는 차가운 그림자

나는 믿고 싶었다 나무처럼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사건은 쉽게 왜곡되고

소리는 쉽게 소실되기 마련이므로,

 

유리잔에서 시계 초침이 힘겹게 넘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 계간 《시와 반시 2020년 봄호

 

 


 

 

박형민 시인 / 꿈

 

 

비밀 일기장을 훔쳐본 산타

머리맡에 두고 간 선물

아버지였다는 걸 깨달은 날이 있었다

 

그날부터,

밤마다 꿈을 몰고 온 새들은

전깃줄에 목을 매달았다

 

출처를 모르는 골목길의 비비탄 총알들

어떤 악몽을 흑백이라 정의해야할까

 

코끼리가 마구마구 공을 굴리고,

개미 다리는 육교 기둥처럼 크다

 

자신의 머리를 향해 리볼버를 당긴 순교자

 

이불보에 흑백 무지개를 그리고,

도대체 몇 번째니

 

악몽을 꾸고 난 다음에는

천사와 악마 두 손이 화해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불보 위에 콜라를 부어버리고,

까만 눈꺼풀로 눈을 덮고

 

나를 혼내는 사람은 십자가여서

알 수 없는 공포들을

수렵해 간 주말엔 신부님께 고해 성사를 했다

 

그래, 나는 당신 머리맡에서 거짓 신음으로 고백한 적이 있었지

 

세례식이 예정된 날

영원히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걸 다짐하며...

 

나는 불알친구들과 도망쳤다

먼 훗날이, 천국이 가까울 찬란한 우리처럼

 

습지의 집으로부터 이사 간 이후

다신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다

 

 


 

 

박형민 시인 / 바이블

 

 

 완전수 7을 생각할 때마다 4가 따라온다. 7을 떠올릴 때마다. 우리는 무시무시한 사해死海를 건너야 한다. 자꾸만 부풀어 오르는 세계에서는 애수哀愁의 탄생처럼 과정 없이 결과만 있을 것. 둥근 식탁 위에 놓인 당신의 밥상, 최후를 떠올릴까, 붉은색의 무리가 가슴속에 일어날 때 성경책 사이에 콘돔을 끼워 신령한 기도를 올렸다. 부끄러워 눈물을 흘릴 때면 계시를 받은 존제처럼 콘돔이 무럭무럭 자라 오르기를 빌었다. 묵상하는 동안에 신神의 음모 하나를 건졌다. 나는 성감대를 찾아요. 혹은 천국, 꿈 물 속의 천당에선 흰 팬티 위는 항상 노란 자국. 아니, 나부끼는 노팬티. 천당 문 도어락에 1.0.04를 누르니 아버지시여, 하늘 문이 활짝 열려요. 나무젓가락처럼 활짝 열려요. 아니, 동성동성 애인의 다리처럼 활짝 열려요. 독실한 인민들은 천당에 가고 마르크스는 지옥에 갔네요. 회개한다면 어제 수음 횟수 세 번, 지나간 전 애인 세 명, 어제 땅에 버린 담배꽁초가 세 개비, 삼위일체 그리고 오지 않는 당신은 나는 죄인처럼 눈을 뜨고, 당신을 기다리다 무지개처럼 기다리다 걸려 버린 조루증

 

「문예바다, (2018년 여름호)

 

 


 

박형민 시인

1994년 출생, 영남대학교 국어교육과. 2017년 ≪시와 반시≫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