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택 시인 / 비에게 쓰다
버스는 아가미를 열고 우산 몇을 띄워놓네 다음 정차역까지 단숨에 가려는 듯 바퀴마다 지느러미 같은 물길이 돋네 수초처럼 흔들리는 이정표는 번들거리며 흘러가네 밤은 네온 글자를 해독하지 못하고, 푸르다가 붉다가 점멸하는 자음만으로 도시를 읽네 건너편 창을 훑고 내려오는 자동차 불빛 밀물처럼 모서리에서 부서지네 물소리가 밤새 저리 뒤척이며 경적을 건져낼 것이네 한 떼의 은빛 치어가 가로등으로 몰려가네 살 오른 빗방울이 창문으로 수없이 입질을 해오지만 내가 던진 찌는 아무것도 물어오지 않네 이렇게 막막한 밤이면 그립다든가 보고 싶다든가, 쓸쓸한 표류를 어쩌지 못하네 무엇이든 깊어지기 시작하면 그렇게 일순간 떠오르는 것 흐르는 생각 끝에 맨홀이 역류하네
윤성택 시인 / 슬픔 감별사
우울 무렵 전망대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본다 사각 케이지 속에서 각기 빛나는 불빛, 철제 닭장에 갇힌 병아리들 같다
슬픔에도 암수가 있다 내 안에서 밖으로 나간 슬픔이 암컷, 밖에서 내 안으로 들어온 슬픔이 수컷이다
암컷은 세상의 산란용이고 수컷은 내 안의 폐기용이다
둥근달이 전깃불처럼 켜졌으므로 감별대에 올려진 것처럼 아뜩해졌다
슬픔은 내게 어떤 쓸모가 있을까 믹서기로 갈 듯 분쇄시켜야 할지 슬픔을 낳고 낳아 기쁨의 유통을 도와야 할지 감별의 밤,
바람이 머리카락을 헤쳐 비비고 달빛이 정수리의 돌기를 들여다본다 검은 상자 너머
부숭부숭한 노랑이 유리창마다 연약하게 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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