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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송희 시인 / 블루스크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2.

이송희 시인 / 블루스크린

 

 

우리의 대화는 유빙처럼 흘러내려

눈물이 된 남극의 꿈이라도 꾼 걸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언어가 허공을 맴돌아

 

닫힌 듯 열려 있는 격자무늬 창문 밖

어디론가 흘러가는 뜬구름만 무성해

 

파랗게 질린 표정 속,

감춰진 이야기들

 

정지된 시계바늘만 바라보다 잠든 새벽

깜깜하게 잠겨버린 눈 코 입을 더듬는다

 

불안한 혀끝에 감긴

소리를 지운다

 

 


 

 

이송희 시인 / 컵

 

 

네 속이 환히 보여 견딜 수 없었다고

 

탁자 위 어슷하게 오후가 저물자

 

모조리 빈말뿐이던

그의 말도 비운다

 

네 몸에 나를 맞추며 나를 쏟아붓던 날

 

내 몸의 향기에 취해

그는 나를 비웠다

 

네 삶의 각본에 갇힌

내 꿈은 출렁였다

 

사라진 내 목소리 찾을 길이 없었다

 

비워진 허공마다 입술의 흔적들이

 

방 안에 쪼그려 앉은

혼잣말을 삼킨다

 

-이송희,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2020)

 

 


 

이송희 시인

1976년 광주에서 출생. 전남대 국문과에서 '서정주 시 텍스트의 인지시학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음.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봄의 계단>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시조집 '환절기의 판화'와 '아포리아 숲', 시해설서 '눈물로 읽는 사서함' 등을 펴냈다. 현재 전남대와 조선대 국문과에 출강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