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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성영희 시인 / 외포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2.

성영희 시인 / 외포리

 

 

해 지자 불빛 몇 물에 뜬다

거꾸로 박힌 집들이 붉은 웃음을 흘리는 해안

길과 산과 꽃들도 지워져

등대 홀로 시를 쓴다

사각 사각 차알...싹

 

초저녁 별 서넛

숙제처럼 떠서

새우가 새우젖 되고, 새우깡이 갈매기 밥 되는 세상을 받아 적다가 가우뚱

부드러운 개펄에 숨겨진 비밀을 푼다

 

바다가 사람을 위로하는 섬 외포리

서쪽으로 난 넓은 창으로 삼보2호가 돌아오고

즐거운 편지처럼 열리는 운율

환하다.

물 위에 뜬 작은 마을

 

 


 

 

성영희 시인 / 티니*

 

 

못참고 전화할지도 몰라요.

내 시를 너무 좋아한다는 그녀가

꼭 한번 만나고 싶다는 그녀가

잠깐이라도 들리면 좋겠다고

친절하게 남겨 놓은 한라대학로85번지

제주에 머물 시간이 점점 줄어들자

눈으로 읽은 글자들이

귓가의 속삭임으로 맴돌았다.

프리지아 한 다발을 사들고

미용실 문을 여는 순간

벚꽃 같은 얼굴로 반기는 그녀

거울 앞에 놓인 노트북엔

그녀와 나의 끈이었다는 듯

활짝 열려 있는 페이스북 화면

저 야무진 손끝에서

싹둑 잘리거나 구불거리는 길고 짧은 생각들이

행간을 셋팅하며

문자 꽃을 피우는 거였다.

 

천 백 고지 눈부신 얼음꽃도

산방산 아래 사랑스런 유채꽃도

꽃받침으로 쓰고 있던 거였다.

 

*제주 이명숙시인의 미용실

 

 


 

 

성영희 시인 / 창문이 발끈

 

 

창문에 발끈, 불빛이 들어간다

저녁의 불빛들은 모두 창문이 된다

커튼을 치면 안쪽의 의중이 되고

걷으면 대답이 되는 바깥

 

집의 주인은 그러니까 창문의 불빛이다

모든 외출은 캄캄하므로

불빛 없는 창문은 사람이 꺼진 것이다

여름 창문에는 여름의 영혼이 있어

날벌레들이 기웃거리고

겨울 창문에는 서리는 것들이 있어

찬바람이 기웃거린다

 

오래전에 기웃거렸던 창문 하나를 우연히 찾았을 때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다면

커튼이 걷히고 발끈,

옛 그림자 하나 튀어나오기라도 한다면

창을 갖는다는 것은 언제든지

나를 잠그거나 열 수 있는 은밀한

고리 하나를 가졌다는 것이다

 

불 밝히지 않고 있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날벌레의 기억이었던가

바람의 틈이었던가

생각하면 여전히 발끈, 치솟는

뜨뜻한 기억

 

 


 

성영희 시인

충남 태안에서 출생.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2017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1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으로 『섬 생을 물질하다』와 『귀로 산다』가 있음. 2015 농어촌 문학상, 2014 제12회 동서문학상 수상. 2019 인천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