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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수연 시인 /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2.

배수연 시인 /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거위들과 누워서 책을 읽었다

사실은 건축가가 아니라 작곡가가 되고 싶었다는 이야기였다

사실은 시인이 아니라 화가가 되고 싶었다는 이야기였고

사실은 소설가가 아니라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는 이야기였다

 

다 같은 거 아닌가?

퐁퐁이 없으면 거위들은 샴푸로 설거지를 한다

 

그 날은 약속한 날이었다

높은 빌딩 근사한 곳에서 밥을 먹는데

거위 하나가 일찍 와 있었다

여기 청소일 알아 봤어

작은 쪽지를 가방에 접어 넣었다

 

이건 오크라, 이건 샬롯, 오! 산초와 루바브

그릇은 비행접시처럼 커다랗고 우리는 둥둥

모르는 것들만 집어 먹었다

 

거위들과 나란히 책을 읽을 때

거지의 개와 과부의 고양이

그런 건 우화였다

 

행복한 손님이 많은 곳에서는 청소 하지마

차라리 종합병원은 어때?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부끄러웠고

 

나와 거위들의 부끄러움은 달라서

함께 책을 읽었다

 

아무도 부탁한 적 없어서 계속할 수 있었다

 

계간 『POSITION』 2021년 가을호 발표

 


 

배수연 시인

2013년 《시인수첩》으로 등단. 시집으로 『조이와의 키스』, 『가장 나다운 거짓말』이ᅠ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