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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양해연 시인 / 중독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1.

양해연 시인 / 중독

 

 

별이 빛나는 밤에도 바람이 어지러웠다

벌판의 해바라기를 바라볼 때도

노란 음표는 허공에서 춤추고 난 거기 도달하고 싶어

 

한 번 더 나를 잊기 위해

 

절망을 요리하던 그 많은 레시피는 구역질나게 상해버린 문장들

아무리 발버둥쳐도 일목요연한 스토린 가질 수 없겠지

반환점을 벌써 지나버렸으니

 

연료게이지는 0에 기울어지고 있다

초대장의 목적지는 빈칸이다

떠도는 휘발성 기체를 흡입하며 불우하게 마비되는 기억들

 

허공의 노란 음표로 데려다준 압생트는 향기일까, 도취일까

진공의 머릿속을 떠다니는 잘린 목소리

마지막 잎이 지면 계절은 가겠지, 그 반대의 경우라도

 

 


 

 

양해연 시인 / 해체주의

 

 

가끔씩 나를 의심해!

속옷 차림으로 외출했을 것만 같아서

온몸 신경이 뻣뻣해지는 느낌이랄까

 

엘리베이터는 기다릴 때 오지 않아

버튼을 눌러도 반응하지 않거나 아예 상관없이 움직여

난폭하게 오르내리며 본성을 드러내지

까마득한 허공에 멈춰 선 채 문이 열려

어서 내리라고 위협하는 것만 같아

갓난아기처럼 발가벗고 있었어

 

처음 나를 의심하던 날이 기억나지 않아!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등굣길

살얼음 낀 연못에 빠졌던 거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

몇 사람이 달려들어 끄집어냈어

온몸이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

호기심 어린 시선과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를 에워싸고 돌고 있었어

 

아침이었는데 밤같이 어두웠어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해야 될 것만 같아 울음을 터뜨렸지

 

 


 

양해연 시인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2016년 계간 《예술가》로 등단. 시집으로 『종의 선택』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