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 / 꽃잎 한 장처럼
살아갈수록 나에겐 사람들이 어여쁘게 사랑으로 걸어오네 아픈 삶의 무게를 등에 지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걸어오는 그들의 얼굴을 때로는 선뜻 마주할 수 없어 모르는 체 숨고 싶은 순간들이 있네 늦은 봄날 무심히 지는 꽃잎 한 장의 무게로 꽃잎 한 장의 기도로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오랫동안 알고 지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그들의 이름을 꽃잎으로 포개어 나는 들고 가리라 천국에까지
이해인 수녀 / 어떤 결심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을 안 하기로 했다
고요히 나 자신만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만치서 행복이 웃으며 걸어왔다
(작은 위로 작은 기도 & 희망은 깨어 있네)
이해인 수녀 / 좀 어떠세요?
좀 어떠세요? 누군가 내게 묻는 이 평범한 인사에 담긴 사랑의 말이 새삼 따뜻하여 되새김하게 되네
좀 어떠세요? 내가 나에게 물으며 대답하는 말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평온하네요'
좀 어떠세요? 내가 다른 이에게 인사할 때는 사랑을 많이 담아 이 말을 건네리라
다짐하고 연습하며 빙그레 웃어보는 오늘
살아서 주고받는 인사말 한 마디에 큰 바다가 출렁이네
(작은 위로 작은 기도 & 희망은 깨어 있네)
이해인 수녀 / 종이에 손을 베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흰 종이에 손을 베었다
종이가 나의 손을 살짝 스쳐간 것뿐인데도 피가 나다니 쓰라리다니
나는 이제 가벼운 종이도 조심조심 무겁게 다루어야지 다짐해본다
세상에 그 무엇도 실상 가벼운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내가 생각없이 내뱉은 가벼운 말들이 남의 피 흘리게 한 일은 없었는지 반성하고 또 반성하면서
(작은 위로 작은 기도 & 희망은 깨어 있네)
이해인 수녀 / 길 위에서
오늘 하루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없어서는 아니 될 하나의 길이 된다
내게 잠시 환한 불 밝혀주는 사랑의 말들도 다른 이를 통해 내 안에 들어와 고드름으로 얼어붙는 슬픔도
일을 하다 겪게 되는 사소한 갈등과 고민 설명할 수 없는 오해도
살아갈수록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나 자신에 대한 무력함도
내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오늘도 몇 번이고 고개 끄덕이면서 빛을 그리워하는 나
어두울수록 눈물날수록 나는 더 걸음을 빨리 한다
(작은 위로 작은 기도 & 희망은 깨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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