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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해인 수녀 / 꽃잎 한 장처럼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4.

이해인 수녀 / 꽃잎 한 장처럼

 

 

살아갈수록 나에겐 사람들이

어여쁘게 사랑으로 걸어오네

아픈 삶의 무게를 등에 지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걸어오는 그들의 얼굴을 때로는

선뜻 마주할 수 없어

모르는 체 숨고 싶은 순간들이 있네

늦은 봄날 무심히 지는

꽃잎 한 장의 무게로 꽃잎 한 장의 기도로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오랫동안 알고 지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그들의 이름을 꽃잎으로 포개어

나는 들고 가리라 천국에까지

 

 


 

 

이해인 수녀 / 어떤 결심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을 안 하기로 했다

 

고요히 나 자신만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만치서 행복이

웃으며 걸어왔다

 

(작은 위로 작은 기도 & 희망은 깨어 있네)

 

 


 

 

이해인 수녀 / 좀 어떠세요?

 

 

좀 어떠세요?

누군가 내게 묻는

이 평범한 인사에 담긴

사랑의 말이

새삼 따뜻하여

되새김하게 되네

 

좀 어떠세요?

내가 나에게 물으며

대답하는 말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평온하네요'

 

좀 어떠세요?

내가 다른 이에게

인사할 때는

사랑을 많이 담아

이 말을 건네리라

 

다짐하고 연습하며

빙그레 웃어보는 오늘

 

살아서 주고받는

인사말 한 마디에

큰 바다가 출렁이네

 

(작은 위로 작은 기도 & 희망은 깨어 있네)

 

 


 

 

이해인 수녀 / 종이에 손을 베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흰 종이에

손을 베었다

 

종이가 나의 손을

살짝 스쳐간 것뿐인데도

피가 나다니

쓰라리다니

 

나는 이제

가벼운 종이도

조심조심

무겁게 다루어야지

다짐해본다

 

세상에 그 무엇도

실상 가벼운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내가 생각없이 내뱉은

가벼운 말들이

남의 피 흘리게 한 일은

없었는지

반성하고 또 반성하면서

 

(작은 위로 작은 기도 & 희망은 깨어 있네)

 

 


 

 

이해인 수녀 / 길 위에서

 

 

오늘 하루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없어서는 아니 될

하나의 길이 된다

 

내게 잠시

환한 불 밝혀주는

사랑의 말들도

다른 이를 통해

내 안에 들어와

고드름으로 얼어붙는 슬픔도

 

일을 하다 겪게 되는

사소한 갈등과 고민

설명할 수 없는 오해도

 

살아갈수록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나 자신에 대한 무력함도

 

내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오늘도 몇 번이고

고개 끄덕이면서

빛을 그리워하는 나

 

어두울수록

눈물날수록

나는 더 걸음을 빨리 한다

 

(작은 위로 작은 기도 & 희망은 깨어 있네)

 

 


 

이해인(李海仁) 시인

1945년 강원도 양구 출생. 본명 : 이명숙. 필리핀 성 루이스 대학 영문학과 졸업. 서울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졸업. 1964년에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 세례명은 벨라뎃다, 수도자 이름은 클라우디아. 입회 이후 '해인'이라는 필명으로 천주교 발간 잡지《소년》에 작품을 투고 시작. 1968년에 첫 서원, 1976년에 종신서원. 1976년에 첫 시집인 《민들레의 영토》를 발간.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부산 가톨릭대학교 교수. 1981년 제9회 새싹문학상. 1985년 제2회 여성동아 대상. 1998년 부산여성 문학상. 2006년 천상병 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