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희 시인 / 건들장마
장대비가 쏟아진다 한낮 햇살 한 줌에도 웃음 가득 머금던 골목도 발목까지 흠뻑 젖었다 입술은 온종일 비 오고 캄캄한 입속은 말라 간다 슬픈 애인 같은 비바람 시퍼런 칼날을 세워 젖은 길들을 오려낸다 하, 춥고 축축해 버리고 싶은 세상 캄캄하게 흐르는 계단을 이고 낯선 언어는 이 젖은 창가에서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삶에는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벼랑이 있는 법 세상이 장미 송이 다발처럼 환한 불빛 가득해도 발목을 젖지 않고는 건널 수 없는 것들이 있지 기댈 기둥 하나 없는 그 길 위에서 적막함을 쓰고 안개 신발을 신고 가뭇없는 길을 나선다 수은등 불빛마저 젖어있는 몽당연필처럼 추운 거리를 떨리며 진저리치며 지나 온 생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밤은 벌써 강으로 내려가 홀로 깊어지는데 하, 아직 얕은 길을 가고 있는 신발 하나
김지희 시인 / 콜레트-장밋빛 시대
콜레트 뼈들이 우는 방을 건넌다 다음 역에서 내린 듯 죽은 그녀의 이름을 인터넷 주소 속에서 찾아 읽는다 피 묻은 치마를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 나지 않아도
나 그녀 콜레트처럼 살고 싶어 콜레트, 나 죽은 사람을 더 좋아해, 죽은 사람과 더 잘 놀아, 자신만의 길을 가 방종하다는 콜레트 내 흉터를 보는데, 내 심장 소리를 듣는데 문장과 문장사이가 이유 없이 벌어진 것처럼 배가 고파 아, 과도過度한 세상, 다시는 생각이 다 닳은 사람처럼 네모난 네 칸 속 세상에 결박당하지 않기를 정말, 나에게까지도
나 피 묻은 아름다운 이름 말고 다른 이름 가지고 싶어 사전 들고 그녀에게 간 적 있지 세상 대열을 이탈해 혼자 손끝에서 문장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토록 뼈들이 우는 방 재우는 일도 잘 익은 사과처럼 떨어져 내려야 한다고...
어제의 자리가 외각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지 콜레트 당신 영혼의 물들이 쏟아져 내리면 전구가 나가 검푸른 어둠이 굽이쳐도 달빛 가랑이 사이가 이토록 환하고 착한 것을... 숨소리는 하루 지나면 사라져도 콜레트 당신 비밀로 가득 차 팽팽해진 새벽 당신이 나르는 감옥의 무게를 가만히 받아 나는 장밋빛 시대의 체온 속으로 들어서고,
<다층> 2020.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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