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시인 / 달이 꾸는 꿈
달 어머니가 국을 푸신다 퍼올리는 국자마다 달덩이 하나씩 폭풍우 끝난 밤 달 아기들이 밥상 아래 둥글게 앉아 있다
그 집은 문을 닫아도 달 냄새 멀리까지 퍼지는 집 꿈 냄새 요란한 여자의 집 사람들은 꿈 속에 나타난 달 어머니에게 오줌을 누고 옷을 벗기고 뺨을 때리고 돼지처럼 구석으로 몰아대고 엉덩이를 때리고 달 아기들은 문 밖에서 울고
그러나 아무도 달이 꾸는 꿈 속의 꿈인 줄도 모르고
(당신의 꿈속은 내 밤 속의 낮 내 몸이 당신 꿈으로 환해지나이다)
달 어머니 탯줄을 자르시고 썰물처럼 떠나가는 날
밤 부엉이 한 마리 창밖 어두운 나뭇가지 위에 앉아 어두운 내 몸 속을 노리고
나는 또 달 어머니 퍼주시는 국 한 그릇 빈집처럼 기다리고 달 어머니 머리 풀고 어디어디 다녀오시는지 그건 아무도 모르고
김혜순 시인 / 얼음의 알몸
너의 흰눈을 저장해둔 곳에 가본 일이 있으며 우박창고에 가본 적이 있느냐*
너는 바다 밑 얼음창고에 가본 적이 있느냐 너는 거기서 물로 빚은 물고기들이 숨죽이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느냐
너는 마음속에 눈이 내려 높이높이 쌓인 눈, 그 속에 숨은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그 사람이 잠 깨어 눈뜰 때 그 눈 속에 떠오르던 검은 달이 우는 걸 본 적이 있느냐
너는 쏜살같이 달려가는 기차에서 쏜살같이 달아나는 흰 산들을 잡으러 해본 적이 있느냐 그 산들의 싸늘한 눈길을 견뎌본 적 있느냐
땡볕 쏟아지는 여름 그 큰 얼음을 아픈 사람처럼 담요에 싸안고 눈물을 훔치며 가던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너는 그 적나라하게 뜨거운 얼음의 알몸을 만져본 적이 있느냐
깊은 밤에 깨어나 우는 사람의 눈물을 받아 먹어본 적 있느냐 그 굳센 얼음이 녹는 기분이 어떨까 생각해본 적 있느냐 그러니 잘 들어라 얼음아씨가 말하노니 너는 우박창고에 가본 적이 있느냐 다 녹아서 흘러가버린 우박창고에 우투커니 서 있어본 적이 있느냐
*「욥기」38장 22절
김혜순 시인 / 날개 환상통
하이힐을 신은 새 한 마리 아스팔트 위를 울면서 간다 마스카라는 녹아 흐르고 밤의 깃털은 무한대 무한대 그들은 말했다 애도는 우리 것 너는 더러워서 안 돼 늘 같은 꿈을 꿉니다 얼굴은 사람이고 팔을 펼치면 새 말 끊지 말라고 했잖아요 늘 같은 꿈을 꿉니다 뼛속엔 투명한 새의 행로 선글라스 뒤에는 은쟁반 위의 까만 콩 두 개 (그 콩 두 개로 꿈도 보나요?) 지금은 식사 중이니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걸어가면서 먹습니다 걸어가면서 머리를 올립니다 걸어가면서 피를 쌉니다 그 이름,새는 복부에 창이 박힌 저 새는 모래의 날개를 가졌다? 바람에 쫓겨 가는 저 새는 저 좁은 어깨 노숙의 새가 유리에 맺혔다 사라집니다 사실은 겨드랑이가 푸드덕거려 걷습니다 커다란 날개가 부끄러워 걷습니다 새 든 집이 몸보다 작아서 걷습니다 비가 오면 내 젖은 두 손이 무한대 무한대 죽으려고 몸을 숨기러 가던 저 새가 나를 돌아보던 순간 여기는 서울인데 여기는 숨을 곳이 없는데 제발 나를 떠밀어주세요
쓸쓸한 눈빛처럼 공중을 헤매는 새에게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고 들어오면 때리겠다고 제발 떠벌리지 마세요 저 새는 땅에서 내동댕이쳐져 공중에 있답니다 사실 이 소리는 빗소리가 아닙니다 내 하이힐이 아스팔트를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오늘 밤 나는 이 화장실밖에는 숨을 곳이 없어요 물이 나오는 곳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나를 위로해주는 곳 나는 여기서 애도합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은 날개를 들어 올리듯 마스카라로 눈썹을 들어 올리면 타일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나를 떠밉니다 내 시를 내려놓을 곳 없는 이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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