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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혜순 시인 / 달이 꾸는 꿈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5.

김혜순 시인 / 달이 꾸는 꿈

 

 

달 어머니가 국을 푸신다

퍼올리는 국자마다 달덩이 하나씩

폭풍우 끝난 밤

달 아기들이 밥상 아래

둥글게 앉아 있다

 

그 집은 문을 닫아도

달 냄새 멀리까지 퍼지는 집

꿈 냄새 요란한 여자의 집

사람들은 꿈 속에 나타난 달

어머니에게 오줌을 누고

옷을 벗기고 뺨을 때리고

돼지처럼 구석으로 몰아대고

엉덩이를 때리고

달 아기들은 문 밖에서 울고

 

그러나 아무도 달이 꾸는 꿈

속의 꿈인 줄도 모르고

 

(당신의 꿈속은 내 밤 속의 낮

내 몸이 당신 꿈으로 환해지나이다)

 

달 어머니 탯줄을 자르시고

썰물처럼 떠나가는 날

 

밤 부엉이 한 마리

창밖 어두운 나뭇가지 위에 앉아

어두운 내 몸 속을 노리고

 

나는 또 달 어머니 퍼주시는 국 한 그릇

빈집처럼 기다리고

달 어머니 머리 풀고 어디어디 다녀오시는지

그건 아무도 모르고

 

 


 

 

김혜순 시인 / 얼음의 알몸

 

 

너의 흰눈을 저장해둔 곳에 가본 일이 있으며

우박창고에 가본 적이 있느냐*

 

너는 바다 밑 얼음창고에 가본 적이 있느냐

너는 거기서 물로 빚은 물고기들이 숨죽이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느냐

 

너는 마음속에 눈이 내려

높이높이 쌓인 눈, 그 속에 숨은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그 사람이 잠 깨어 눈뜰 때

그 눈 속에 떠오르던 검은 달이

우는 걸 본 적이 있느냐

 

너는 쏜살같이 달려가는 기차에서

쏜살같이 달아나는 흰 산들을 잡으러 해본 적이 있느냐

그 산들의 싸늘한 눈길을 견뎌본 적 있느냐

 

땡볕 쏟아지는 여름 그 큰 얼음을 아픈 사람처럼 담요에 싸안고

눈물을 훔치며 가던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너는 그 적나라하게 뜨거운 얼음의 알몸을 만져본 적이 있느냐

 

깊은 밤에 깨어나 우는 사람의 눈물을 받아 먹어본 적 있느냐

그 굳센 얼음이 녹는 기분이 어떨까 생각해본 적 있느냐

그러니 잘 들어라 얼음아씨가 말하노니

너는 우박창고에 가본 적이 있느냐

다 녹아서 흘러가버린 우박창고에 우투커니

서 있어본 적이 있느냐

 

*「욥기」38장 22절

 

 


 

 

김혜순 시인 / 날개 환상통

 

 

하이힐을 신은 새 한 마리

아스팔트 위를 울면서 간다

마스카라는 녹아 흐르고

밤의 깃털은 무한대 무한대

그들은 말했다

애도는 우리 것

너는 더러워서 안 돼

늘 같은 꿈을 꿉니다

얼굴은 사람이고

팔을 펼치면 새

말 끊지 말라고 했잖아요

늘 같은 꿈을 꿉니다

뼛속엔 투명한 새의 행로

선글라스 뒤에는

은쟁반 위의 까만 콩 두 개

(그 콩 두 개로 꿈도 보나요?)

지금은 식사 중이니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걸어가면서 먹습니다

걸어가면서 머리를 올립니다

걸어가면서 피를 쌉니다

그 이름,새는

복부에 창이 박힌 저 새는

모래의 날개를 가졌다?

바람에 쫓겨 가는 저 새는

저 좁은 어깨

노숙의 새가

유리에 맺혔다 사라집니다

사실은 겨드랑이가 푸드덕거려 걷습니다

커다란 날개가 부끄러워 걷습니다

새 든 집이 몸보다 작아서 걷습니다

비가 오면 내 젖은 두 손이 무한대 무한대

죽으려고 몸을 숨기러 가던 저 새가

나를 돌아보던 순간

여기는 서울인데

여기는 숨을 곳이 없는데

제발 나를 떠밀어주세요

 

쓸쓸한 눈빛처럼

공중을 헤매는 새에게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고

들어오면 때리겠다고

제발 떠벌리지 마세요

저 새는 땅에서 내동댕이쳐져

공중에 있답니다

사실 이 소리는 빗소리가 아닙니다

내 하이힐이 아스팔트를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오늘 밤 나는

이 화장실밖에는 숨을 곳이 없어요

물이 나오는 곳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나를 위로해주는 곳

나는 여기서 애도합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은 날개를 들어 올리듯

마스카라로 눈썹을 들어 올리면

타일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나를 떠밉니다

내 시를 내려놓을 곳 없는 이 밤에

 

 


 

김혜순 시인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강원대학교 국문학과와 건국대학교 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박사).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에  '담배를 피우는 시체' 로 등단. 1997년 「김수영문학상」, 2000년 「현대시작품상」, 2000년 「소월시문학상」, 2006년 「미당문학상」, 2008년  「대산문학상」 수상. 시집  『또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기계』, 『달력 여행기』, 『들끓는 사랑』 등이 있음. 현재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