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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순 시인 / 감정이 산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5.

강순 시인 / 감정이 산다

 

 

조카야, 감정은 숲속 마녀의 것이란다 마녀와 사는 난쟁이들은 마녀의 감정을 가지고 놀지 마녀의 감정을 가지고 저글링을 하고 장작을 패고 만돌린을 연주하지 감정의 방향은 일 년 동안 돌아오지 않는 검둥개 같아

 

감정은 목이 마르지 잘 보이고 싶지만 느리지 발자국을 남기며 흰 눈 위를 오래 걸어 들어간단다 타오르는 장작불만큼 뜨겁지만 아무도 흡족한 파이를 가져다주지 않았어

 

숲은 깊고 깊은 것은 오두막이고 감정은 어둠이 쌓인 둥근 탁자의 주위에 깊게 몰려 있어 조카야, 핀을 뽑지 않은 독약 병은 언제 터질지 모른단다

 

하지만 탁자를 지나 나무 침대의 모서리 쪽으로 몸을 돌리면 감정은 연인의 입술처럼 달콤해지기도 해 감정은 남자들에게 한 손을 내어주고 다른 한 손은 꿈 밖에 걸치고 있어

 

이모, 둥둥 떠오르는 음악을 움켜쥐면 감정은 종이를 빠져나가는 비밀 글자들 같나요? 그래서 감정은 텅 빈 탁자에서 개와 파이를 계속 기다리나요? 두 발이 푹푹 빠지는 구간 반복 마법에서 깨어나도 감정은 침대 커버 위에 쏟아진 찌개 국물 같나요?

 

계간 『문예연구』2021년 겨울호 발표

 

 


 

 

강순 시인 / 빈 자리

 

 

누군가를 구겨서 버린 적이 있어 어둠 속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자국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내가 버린 것이 버스 정류장에 서 있을 때, 공원 벤치에 앉아 있을 때, 분식집 탁자 옆에 있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지

 

생각의 끝은 도대체 무엇일까 상처에 스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유퍼스 나무처럼 너를 응고 시키는 독이 되는 방법을 생각해 그런데 다정한 너는 너무 많고 나의 독성은 빨리 자라질 않네 손을 꼭 잡고 노래를 부르는 너와 따뜻한 물속으로 같이 들어가는 네가 한꺼번에 구겨질 순 없는 거야?

 

너의 노래가 천정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밤, 이 밤을 들어서 한꺼번에 구기면 모기 소리 매미 소리도 같이 구겨진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와 순백의 웃음을 나누며 핫도그를 먹던 나와 눈사람을 굴리며 좋아하던 나와 그런 나를 지켜보며 웃는 너를 한꺼번에 다 구길 수 없을까?

 

상처를 앓았던 흔적이 나라면 이파리들이 왜 초록색인지 그 이유를 이제 알겠어 초록은 그 이전에 연두였고 연두 이전에 잿빛이었고 잿빛 이전에 어둠이어서 나는 혼자 어둠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 초록이 되었네

 

우리가 걸었던 시간 속에서 너와 나를 분리해서 집게로 건져내면 너는 슬픈 말 나는 아픈 말로 구분될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리가 버린 나무가 다른 집의 울타리를 풍성하게 하는 지금도 우리는 그 말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서로에게 잊히기를 소망하다가 서로를 구기며 매일 사라지는 연습을 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우리는 생각 속에서 매일 조금씩 자라는 나무인 걸까 항상 빈 자리를 보면 아픈 것들이 생각나 그것들을 구기던 시절이 생각나

 

계간『시와 사상』2021년 겨울호 발표

 

 


 

강순 시인

1998년 《현대문학》에 〈사춘기〉 등으로 등단. 시집으로 『이십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와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이 있음. 2019년 경기문화재단 우수작가 선정.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 수료. 2021 전국 계간 문예지 우수작품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