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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화영 시인 / 몸속의 사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5.

이화영 시인 / 몸속의 사원

 

 

당신과의 인연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이 된 후

 

내 몸속에 사원이 생겼습니다

사원의 누각에 걸린 종에는 당신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내가 바느질하듯 정으로 새긴 형상입니다

아직 아무에게도 누설하지 않았습니다

생이 비루하게 느껴지는 날이면 한동안 버려두었던

종채를 찾아 누각에 올라갑니다

당신의 음성이 종소리 되어 울려 퍼져 나간 자리마다

우묵한 우물이 파였습니다

우물이 찰박찰박 깊어질 때

벌레와 몸을 기댄 풀잎이 고요를 젖히며 일어납니다

당신이 사원을 나와 천천히 뒤편의 숲으로 들어가

바위에 엎드려 태아처럼 웅크립니다

그런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몸은 신열이 올라

우물을 퍼 올려 마른 정수리에 끼얹습니다

당신이 내 태아인 듯 양수가 부풀어 오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영겁의 인연이라면 어느 전생에서는 내가 당신의

여식이거나 남편이기도 했을 겁니다

다가올 어느 사후에는 당신이 내 자식이기도 할 겁니다

그 사원은 내 자궁 안에 있습니다

사원과 몸을 바꾼 바람이 알려준 비밀입니다

 

 


 

 

이화영 시인 / 애무와 애원사이

 

 

스콜 한차례 지나간 인도 열대우림 속

코브라 숫뱀이 여왕 뱀에게 다가와 유려한 애무를 펼친다

 

연 이틀 달무리 피고 질 때까지 다른 수컷과

수십 번 날아오른 여왕 뱀의 나른한 표피는

더운 입김을 피해 느릿느릿 도망친다

 

긴 몸만큼이나 긴 거부

숫뱀의 관능의 열기가 목울대 쪽으로 빠르게 올라간다

순간,

핥던 목에 독니를 콱 박는 숫뱀

 

혈관을 타고 번지는 여왕뱀의 마지막 결기어린 毒白

-죽음이 인연이었다면

이렇게라도 끝내서 다행이야-

 

정글의 하루는

애무와 죽음이 자웅동체로 내린다

 

얼굴 붉어지던 심장의 고동 소리도

단단한 가슴이 주던 달콤함도

본능의 행성은 이제 캄캄하다

 

짐승의 始原은 송곳니와 독

애초부터 짐승에게 관념 따윈없었다

 

애무와 애원사이에는

당신도 나도 모르게 키우는 독니 하나있다

 

해질 무렵이면

꽃들은 상처를 원하고

그것들은 더 빛이 난다

 

 


 

이화영 시인

전북 군산 출생.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 2009년 《정신과 표현》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침향』(혜화당, 2009)과 『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한국문연, 2015)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