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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일환 시인 / 달팽이처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5.

박일환 시인 / 달팽이처럼

 

 

나는 왜 내 마음속으로만 달리는 걸까?

부릉부릉 시동을 건 다음

태우고 싶던 사람들 하나둘 지워 버리고

내 마음속 외줄기 도로 위를 나 홀로

달리고 또 달리는 나는, 왜?

 

남의 차에 올라타기는커녕

내 차에 남을 태우지도 못하고

혼자서만 끝없이 펼쳐 놓은 길을 달려갔다

지쳐서 돌아오길 반복하는 걸까?

 

비 갠 날 오후

학교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만난

달팽이 한 마리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물어본다

 

너도 껍질 밖으로 나오고 싶니?

대답 없는 달팽이를 놓아두고

집으로 돌아와 달팽이처럼 웅크린다

 

달팽이가 더듬이를 내밀듯

나도 마음속 안테나를 세워 본다

괜찮아, 지금은 잠시 외로워도 괜찮아

어디선가 들려올 목소리에 기대 본다

 

나와 같은 외톨이가 어딘가에 또 있을 거야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혼자서 생각에 잠긴 나를 위해 하느님이

걱정 마,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어.

조그맣게 속삭이고 있을 거야

 

-박일환 시집 <만렙을 찍을 때까지>에서

 

 


 

 

박일환 시인 / 첫눈을 사랑하는 나라

 

 

그 나라 사람들은 매일 기도를 드리는데, 기도 제목은 언제나 자연이라네. 자연이 언제나 자연 그대로 있을 수 있게 인간이 자연을 해치지 않기를 기도한다네.

 

그 나라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믿는 이유는 이웃이 행복하기 때문이라네. 가족이 웃고 친구가 웃고 이웃이 웃어서 자신도 웃지 않을 수가 없다네.

 

그 나라는 첫눈이 내리는 날을 공휴일로 지정한다네. 일터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은 눈사람을 만들어 이웃집에 놓아 준다네. 눈사람이 놓인 집에서는 눈사람 만든 이에게 한턱을 내면서 서로 축제를 즐긴다네.

 

가난한 이들이 가난하게 모여 사는 부탄 왕국, 그 나라 사람들이 첫눈을 꼭꼭 밟아서 생긴 무늬가 어쩌면 평화의 상형문자일지도 모르겠네.

 

-박일환 시집 <만렙을 찍을 때까지>에서

 

 


 

박일환 시인

1961년, 충북 청주시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97년 《내일을 여는 작가》의 추천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푸른 삼각뿔』, 『끊어진 현』, 『덮지 못한 출석부』, 『등 뒤의 시간』, 『만렙을 찍을 때까지』와 해설집 『선생님과 함께 읽는 이용악』이 있음. 전 구일중학교 교사. 1992. 제4회 전태일문학상 단편소설부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