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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한라 시인 / 색감(色感)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5.

박한라 시인 / 색감(色感)

 

 

잉크가 뿌리를 내리듯이 종이에 스며든다

잉크는 종이의 깊이를 안다

 

잉크는 식물이 자라나듯 피어나고 냄새를 풍긴다

나는 잉크 냄새를 좋아하진 않지만

이 냄새에 끌리고 있다

 

잉크는 종이가 하얗게 망각한 지하의 기억이다

종이는 얇지만 잉크는 깊다

문득 잉크에 쏴한 지하의 냄새가 나기도 한다

 

잉크 속에는 누구나 다녀갔지만

아무도 흔적을 남기지 못한 공간이 있다

그곳은 언제나 새 곳이다

 

신선한 외로움이 새의 착지처럼 늙어갈 때

잉크는 종이와 익숙해진다

 

잉크는 모든 냄새를 잃고 까맣게 말라비틀어진다

잉크는 죽었는데 색이 진하게 남아 있다

나는 색 앞에서 점점 오싹해진다

 

-『시작』 2017-겨울호 <시작이 주목하는 젊은 시인>에서

 

 


 

박한라 시인

2012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을 통해 등단.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박유하(朴有廈). 한남대학교 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