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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영춘 시인 / 숨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6.

이영춘 시인 / 숨

-한 순간 여왕처럼

 

 

그날도 미사를 올리듯 눈이 내렸다

유리문 밖에서 호흡을 가다듬는 여덟 남매의 눈빛은

눈발처럼 형형하게 헝클어졌다

유리관 속 얼굴은 환한 꽃을 피웠다

1초, 2초, 3초, 4초 …… 호흡 단말기가 내려가는 동안

우리들의 다리는 눈발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한 사람이 눈을 감는다는 것은

한 사람이 숨을 멈춘다는 것은

이 세상 전부를 지우는 것

이 세상 전부를 버리는 것

 

고생대 원시의 토굴에서 세상 속으로 걸어나와

긴- 역마를 끌고

세상의 대륙을 종횡무진 달리다가

앙상한 뼈 몇 조각으로 남는 것

 

평화로운 듯 잠든 창호지 같은 얼굴

푸른 입술의 멈춤

검은 먹물의 입술

한 세상이 닫히는 숨, 숨,

 

유리문 밖에서 나비날개처럼 떨고 있는 우리들은

우리들의 제의 같은 울음소리는 허공을 맴도는데

그분은 끝내 유리관 속에서

가장 거룩한 옷을 입은 한 순간의 여왕처럼

염장이의 손끝에서 그렇게 가셨다

제왕 같은 관이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계간 『시사사』 2022년 봄호 발표

 

 


 

이영춘 시인

강원도 평창 봉평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7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시시포스의 돌』, 『귀 하나만 열어 놓고』, 『네 살던 날의 흔적』, 『슬픈 도시락』』, 『시간의 옆구리』, 『봉평 장날』, 『노자의 무덤을 가다』, 『신들의 발자국을 따라』와 시선집『들풀』『오줌발,별꽃무늬』 등이 있음. 윤동주문학상. 고산문학대상. 인산문학상. 강원도문화상. 동곡문화예술상. 한국여성문학상. 유심작품상 특별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