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춘 시인 / 숨 -한 순간 여왕처럼
그날도 미사를 올리듯 눈이 내렸다 유리문 밖에서 호흡을 가다듬는 여덟 남매의 눈빛은 눈발처럼 형형하게 헝클어졌다 유리관 속 얼굴은 환한 꽃을 피웠다 1초, 2초, 3초, 4초 …… 호흡 단말기가 내려가는 동안 우리들의 다리는 눈발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한 사람이 눈을 감는다는 것은 한 사람이 숨을 멈춘다는 것은 이 세상 전부를 지우는 것 이 세상 전부를 버리는 것
고생대 원시의 토굴에서 세상 속으로 걸어나와 긴- 역마를 끌고 세상의 대륙을 종횡무진 달리다가 앙상한 뼈 몇 조각으로 남는 것
평화로운 듯 잠든 창호지 같은 얼굴 푸른 입술의 멈춤 검은 먹물의 입술 한 세상이 닫히는 숨, 숨,
유리문 밖에서 나비날개처럼 떨고 있는 우리들은 우리들의 제의 같은 울음소리는 허공을 맴도는데 그분은 끝내 유리관 속에서 가장 거룩한 옷을 입은 한 순간의 여왕처럼 염장이의 손끝에서 그렇게 가셨다 제왕 같은 관이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계간 『시사사』 2022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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