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연숙 시인 / 신과 발 - 앙리마그리트의 붉은 모델
신발은 신과 발이 함께 걸어온 흔적 신은 나의 발을 감싸고 나의 발은 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신을 안내하였다
신을 벗으면 발까지 벗겨진다 앙리 마그리트가 벗어놓은 발을 책상 앞에 걸어 놓고 내가 걸어 온 발에 대하여 앞으로 데리고 가야 할 신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다
신은 반발할지 모른다 내가 너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이라고, 그래도 괜찮다 신은 신이 아니어서 신에 대한 불경이 아니라고 신을 다독여 준다 아니, 내가 발 디딘 곳 어디에나 신이 있었다고 진심의 고백을 한다
한겨울 등굣길 아궁이에 따뜻하게 신발을 데워 댓돌 위에 얹어놓던 아버지의 손이 어린 내겐 신이었다 그 신을 신은 나의 발은 춤추듯 가벼웠고 눈 내린 등굣길에선 뽀드득 뽀드득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손바닥에서 쏟아져 나오는 개미 떼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개미 한 마리가 또깍또깍 하이힐을 신고 도착한 세상에서 부르트고 물집 잡힌 발 나의 신은 발바닥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가 찢어질 때까지 나의 발을 감싸 주었고 발 디딜 곳을 지켜주었다
무릎을 갈아 끼우고 치아를 갈아 끼우며 낡아가는 나의 신,발
흙을 털고, 물기 말린 발의 신을 앙리 마그리트 그림 속에 다시 넣어 조용히 책상 앞에 걸어 둔다
월간 『모던포엠』 2022년 2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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