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노 시인 / 바보 공화국
바보야. 바보야 오너라. 바보의 얼굴로, 바보가 아니면 바보가 되어. 바보로 웃음이 좋은 얼굴로, 바보라 씻지 않고 오면 코 휭 풀어주고 때 국물 흐르는 얼굴, 풀뿌리처럼 하얗게 씻어주고 우리 바보로 살자, 계산도 뭐도 할 줄 모르는 바보로 살자.
달리는 차들이 싫어, 디지털이니 아날로그라는 말마저 싫어. 그저 바보의 보폭으로, 바보의 생각으로, 어떤 날은 만장을 들고 달리고, 어떤 날은 깃발을 들고 달리고, 바보의 혁명이라는 말을 긁적여 보고 이제 우리 바보로 살자, 바보로 살자.
바보가 바라보는 달은 바보 달, 바보로 해를 바라보면 바보 해, 바보가 좋아하는 꽃은 바보 꽃, 청산에 살어리랐다 하면 바보 청산, 성황당 고개 너머로 걸린 무지개는 바보 무지개, 바보의 그리움, 바보의 노래, 바보인 바다, 바보인 멸치 떼, 메이드인 바보가 좋다.
바보야. 바보야 어울리자. 바보 새와 바보 검둥이와 바보 염소와 바보 닭과 바보인 이장과 바보 대통령과 바보로 아등바등 살며 바보스럽게 허허 웃으며 간질이면 바보 산모퉁이를 돌아 한 줄기 바보 바람이 불면 분분이 휘날리며 바보 세상을 수놓는 바보 꽃잎, 꽃잎
바보야. 바보의 사랑은 바보 정도면 돼, 사랑한다고 먹지 않고 알 가지런한 옥수수를 들고 가다 끝내 시어버려 버리며 그것이 뭐가 좋은 지 웃는, 바보만큼 사랑하고, 그것이 뭐가 좋은 지 바보로 울고, 바보로 꿈을 질질 흘리고 다녀도 돼. 바보 공화국의 바보라도 좋아
계간 『시작』 2022년 봄호 발표
김왕노 시인 / 경계에서 피는 사랑
복독이 맹독이라 자칫하면 중독되어 죽으므로 복회를 뜨며 치명적이지 않게 복독을 남기는 게 복회를 뜨는 고수만이 가지는 기술이라는데 치명과 치명적이지 않는 경계를 그어 얻는 새파란 극한의 맛 목숨을 담보로 얻는 잊지 못할 맛이라는데
허기진 마음이란 그 노란 복알을 주워 먹고서 잠깐의 포만 후 즉사한다는 데 사랑도 복독과 같다는 것 과하다가 보면 포만으로 죽고 허기지면 그 사랑이 맹독이라도 끓여 먹고 싶은 것이라
오, 죽음의 경계 드나들며 얻고 싶은 사랑이여
계간 『미네르바』 2022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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