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황흠 시인 / 엿보다
부지깽이도 바쁘다는 농번기 어둑새벽 무논에 나온 영산댁
늦둥이 딸년 업고 물꼬를 돌아보다가 아이가 울어 논둑에 퍼질러 앉는다
급하게 젖통을 까대고 부풀어 붉은 꼭지를 물리는데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뛰어든 개구리
이른 아침부터 와글와글 울어 싼다
김황흠 시인 / 바닥을 마주친다는 것
길바닥과 발바닥이 서로 사정없이 치고 미련 없이 뗀다
연거푸 치고 떼며 더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치고받는 바닥 끝까지 마주치는 일은 죽어서야 끝나는 일
날마다 부대끼며 살아도 막상 보면 허깨비 보듯 살아온 것 같아
돌아보면 마주치고 온 길바닥이 텅 비었다
누구를 바라보는 여물진 마음 가져보진 못한 내 발도 가는 길도 저마다 바닥이 있다
김황흠 시인 / 누비옷
폐가를 치운 자리 금실 박은 옷이 서리에 하얗다
오래 전 양철 문 삐뚜름히 열어 밖을 내다보던 노인 부은 눈이 떠올랐다
분홍색 금실 박은 두툼한 옷 집이 치워진 마지막까지 문간에 걸려 있었다
터진 옷 솔기가 바람에 헤적인다 아이고매야, 아직껏 안 가셨는가 어서 가시오, 할무니!
몸이 빠져나간 텅 빈 옷을 먼 친척 조카며느리가 태우다 만 불구덩이에 넣는다
김황흠 시인 / 화톳불
공터에서 품앗이 나가는 아짐들 봉고차 기다리는 동안 불을 피워 놓고 손을 쬔다
활활 타오르던 불길 타닥타닥 섬광을 피우는 불꽃
하나하나가 다른 모습으로 타오르다가 꺼져 갈 때
마른 잔가지인 양 호미질로 단련된 손 작정이 넣어 살리는 화톳불
오늘도 등 따습게 살자고 남은 불길에 슬쩍 손 쬐는 내 하루도 빨갛다
김황흠 시인 / 민들레
밭일하다가 쉴 참에 둑에 풀썩 주저앉는데 뭔가 엉덩이를 툭 친다
이봐요 암 디나 궁둥이 들이밀지 마세요
가만히 보니 벙글벙글 노란 민들레 가족
하나, 둘, 셋, 넷, 다섯 식구 오글오글 모여 해바라기 중이다
김황흠 시인 / 낮달
담장 아래 고양이 슬금슬금 지나가자 개가 얼른 일어나 꼬나보며 옴팡지게 짖는다
철렁! 할멈 구슬을 물에 빠트렸다고 지금도 짖는다
서슬에 꼬리 잔뜩 세운 고양이 네가 말을 시킨 바람에 빠트린 거 아니냐고
털을 서슬 퍼렇게 돋치고 눈 부라리며 잔뜩 구부린 등짝이 하얗다
김황흠 시인 / 유령으로 살기
농로 귀퉁이 억새 풀더미가 에워싼 경운기 있는 지도 모른다
한때 귀한 몸이 트럭에 밀리고부터 고물로 변한 자존심은 이미 녹슬었다
환삼덩굴이 옭아매고 메꽃이 옭아매도 이젠 괜찮아, 괜찮아
풀 속에 누워 듣는 장송곡 노랗게 풍화한 가을
어느 순간 너에게 잊힌 얼굴 까마득한 망각에 내가 산다
김황흠 시인 / 막걸리 통 한가위 달
술이 둘째라면 세상 서럽다고 하던 나주아짐 조그마한 키에 굵은 주름이 훈장인 둥그스름한 얼굴이 붉어지면 집 마당서 달 보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동네 아짐들 저 여편네가 또 지랄한다고 하면서도 먼저 간 양반이 그리워 그런다고 혀를 차고는 했다
이앙기가 못다 심은 모 사이를 때우고 피사리하고 나락을 베고 나면 짚가리 훑어 이삭 줍고 집터에 심은 검정콩 메주콩 타작만큼이나 술 좋아하더니
지난해부터 추석이면 달무리 두레 방석에 앉아 두 내외 말술을 나누고 있다
- 김황흠 시집 『책장 사이에 귀뚜라미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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