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애경 시인 / 여자
양잿물로 삶아 햇볕에 잘 말린 란닝구처럼 하얗고 보송한 여자
가슴팍에 코를 묻으면 햇빛 냄새가 나는 여자 머리칼에 뺨을 대면 바람 냄새가 나는 여자 잘 웃는 여자
낡은 메리야스처럼 주변 습기를 금방 흡수해 쥐어짜기만 하면 물이 흐르는 여자 잘 우는 여자
편서풍에 날아간 여자 빠른 시냇물에 둥둥 떠 급히 흘러간 여자
오래 입고 여러 번 빨아 얇아진 그 여자
지금 어디 있나?
-시집 『읽었구나』 (현대시학, 2022) 중애서
양애경 시인 / 귀
뾰족 솟은 짐승의 귀를 보면 슬퍼진다
멀리서 자기를 바라보는 줄 어찌 아는지 쫑긋, 떨리며 위로 올라가는 귀
오늘도 그랬다
고속도로에서 마주친 거대한 가축 수송차량 안
비죽 솟은 돼지의 순하디순한 분홍색 귀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말하고 말았다
―내가 너를 먹고 살아야 하는 거니?
-시집 『읽었구나』 (현대시학, 2022) 중애서
양애경 시인 / 스텔라 매카트니
스텔라, 느슨한 베이지색 가디건을 만들어줘요 몸을 옥죄는 너무 작은 옷 말고요 여자의 몸은 볼록 솟은 가슴 잘록한 허리 도톰한 아랫배 그대로 아름다와요
스텔라, 거품 같은 면레이스가 달린 하얗고 긴 면셔츠를 지어 줘요 바람이 불면 꽃무늬 치마 위로 따스하고 보송한 셔츠 자락이 펄럭이게요
슬픈 일이 있어도 험한 일이 있어도 여자에게서 몇 번 빨아 얇아진 드레스를 빼앗을 수는 없어요 드레스는 눈물을 먹어요 다시 말라요
스텔라, 코코를 기억해요 여자가 지식이 많으면 마녀로 화형당하던 시절과 여자가 바지를 입으면 체포당하던 시절을 갓 지나 여자들에게 바지를 지어 입히고 남자들의 세상 가운데 당당하게 서게 한, 우리는 코코를 기억해요
스텔라, 여자를 편안하게 여자를 아름답게 해주는 옷을 지어요
옷은 우리의 족쇄가 아니라 자유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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