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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양애경 시인 / 여자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3.

양애경 시인 / 여자

 

 

양잿물로 삶아

햇볕에 잘 말린 란닝구처럼

하얗고 보송한 여자

 

가슴팍에 코를 묻으면

햇빛 냄새가 나는 여자

머리칼에 뺨을 대면

바람 냄새가 나는 여자

잘 웃는 여자

 

낡은 메리야스처럼

주변 습기를 금방 흡수해

쥐어짜기만 하면 물이 흐르는 여자

잘 우는 여자

 

편서풍에 날아간 여자

빠른 시냇물에 둥둥 떠 급히 흘러간 여자

 

오래 입고 여러 번 빨아 얇아진

그 여자

 

지금 어디 있나?

 

-시집 『읽었구나』 (현대시학, 2022) 중애서

 

 


 

 

양애경 시인 / 귀

 

 

뾰족 솟은

짐승의

귀를 보면

슬퍼진다

 

멀리서

자기를 바라보는 줄 어찌 아는지

쫑긋, 떨리며 위로 올라가는

 

오늘도 그랬다

 

고속도로에서 마주친

거대한 가축 수송차량 안

 

비죽 솟은

돼지의

순하디순한

분홍색 귀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말하고 말았다

 

―내가

너를 먹고 살아야 하는 거니?

 

-시집 『읽었구나』 (현대시학, 2022) 중애서

 

 


 

 

양애경 시인 / 스텔라 매카트니

 

 

스텔라, 느슨한 베이지색 가디건을 만들어줘요

몸을 옥죄는 너무 작은 옷 말고요

여자의 몸은 볼록 솟은 가슴

잘록한 허리

도톰한 아랫배

그대로 아름다와요

 

스텔라, 거품 같은 면레이스가 달린

하얗고 긴 면셔츠를 지어 줘요

바람이 불면 꽃무늬 치마 위로

따스하고 보송한 셔츠 자락이 펄럭이게요

 

슬픈 일이 있어도

험한 일이 있어도

여자에게서

몇 번 빨아 얇아진 드레스를 빼앗을 수는 없어요

드레스는 눈물을 먹어요

다시 말라요

 

스텔라, 코코를 기억해요

여자가 지식이 많으면 마녀로 화형당하던 시절과

여자가 바지를 입으면 체포당하던 시절을 갓 지나

여자들에게 바지를 지어 입히고

남자들의 세상 가운데 당당하게 서게 한,

우리는 코코를 기억해요

 

스텔라,

여자를 편안하게

여자를 아름답게 해주는

옷을 지어요

 

옷은 우리의 족쇄가 아니라

자유니까요

 

 


 

양애경 시인

1956년 서울에서 출생. 충남대 국문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과 『사랑의 예감』, 『바닥이 나를 받아주네』, 『내가 암늑대라면』, 『맛을 보다』, 『읽었구나』. 한성기문학상, 애지문학상, 충청남도문화상, 대전시문화상, 제4회 김종철문학상 수상. 공주영상정보대학 영상문예창작과 교수 역임.  현재 〈시힘〉과 〈화요문학〉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