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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황흠 시인 / 엿보다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3.

김황흠 시인 / 엿보다

 

 

부지깽이도 바쁘다는 농번기

어둑새벽 무논에 나온 영산댁

 

늦둥이 딸년 업고 물꼬를 돌아보다가

아이가 울어 논둑에 퍼질러 앉는다

 

급하게 젖통을 까대고

부풀어 붉은 꼭지를 물리는데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뛰어든 개구리

 

이른 아침부터 와글와글 울어 싼다

 

 


 

 

김황흠 시인 / 바닥을 마주친다는 것

 

 

길바닥과 발바닥이

서로 사정없이 치고

미련 없이 뗀다

 

연거푸 치고 떼며

더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치고받는 바닥

끝까지 마주치는 일은 죽어서야 끝나는 일

 

날마다 부대끼며 살아도 막상 보면

허깨비 보듯 살아온 것 같아

 

돌아보면 마주치고 온

길바닥이 텅 비었다

 

누구를 바라보는 여물진 마음 가져보진 못한

내 발도 가는 길도

저마다 바닥이 있다

 

 


 

 

김황흠 시인 / 누비옷

 

 

폐가를 치운 자리

금실 박은 옷이 서리에 하얗다

 

오래 전 양철 문 삐뚜름히 열어

밖을 내다보던 노인

부은 눈이 떠올랐다

 

분홍색 금실 박은 두툼한 옷

집이 치워진 마지막까지

문간에 걸려 있었다

 

터진 옷 솔기가 바람에 헤적인다

아이고매야, 아직껏 안 가셨는가

어서 가시오, 할무니!

 

몸이 빠져나간 텅 빈 옷을

먼 친척 조카며느리가

태우다 만 불구덩이에 넣는다

 

 


 

 

김황흠 시인 / 화톳불

 

 

공터에서 품앗이 나가는 아짐들

봉고차 기다리는 동안

불을 피워 놓고 손을 쬔다

 

활활 타오르던 불길

타닥타닥

섬광을 피우는 불꽃

 

하나하나가 다른 모습으로

타오르다가 꺼져 갈 때

 

마른 잔가지인 양

호미질로 단련된 손

작정이 넣어 살리는 화톳불

 

오늘도 등 따습게 살자고

남은 불길에 슬쩍 손 쬐는

내 하루도 빨갛다

 

 


 

 

김황흠 시인 / 민들레

 

 

밭일하다가 쉴 참에

둑에 풀썩 주저앉는데

뭔가 엉덩이를 툭 친다

 

이봐요

암 디나 궁둥이 들이밀지 마세요

 

가만히 보니 벙글벙글

노란 민들레 가족

 

하나, 둘, 셋, 넷, 다섯 식구

오글오글 모여 해바라기 중이다

 

 


 

 

김황흠 시인 / 낮달

 

 

담장 아래 고양이 슬금슬금 지나가자

개가 얼른 일어나 꼬나보며 옴팡지게 짖는다

 

철렁!

할멈 구슬을 물에 빠트렸다고

지금도 짖는다

 

서슬에 꼬리 잔뜩 세운 고양이

네가 말을 시킨 바람에 빠트린 거 아니냐고

 

털을 서슬 퍼렇게 돋치고

눈 부라리며 잔뜩 구부린

등짝이 하얗다

 

 


 

 

김황흠 시인 / 유령으로 살기

 

 

농로 귀퉁이 억새 풀더미가 에워싼 경운기

있는 지도 모른다

 

한때 귀한 몸이 트럭에 밀리고부터

고물로 변한 자존심은 이미 녹슬었다

 

환삼덩굴이 옭아매고

메꽃이 옭아매도

이젠 괜찮아, 괜찮아

 

풀 속에 누워 듣는 장송곡

노랗게 풍화한 가을

 

어느 순간 너에게 잊힌 얼굴

까마득한 망각에 내가 산다

 

 


 

 

김황흠 시인 / 막걸리 통 한가위 달

 

 

술이 둘째라면 세상 서럽다고 하던 나주아짐

조그마한 키에 굵은 주름이 훈장인

둥그스름한 얼굴이 붉어지면

집 마당서 달 보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동네 아짐들

저 여편네가 또 지랄한다고 하면서도

먼저 간 양반이 그리워 그런다고 혀를 차고는 했다

 

이앙기가 못다 심은 모 사이를 때우고

피사리하고

나락을 베고 나면 짚가리 훑어 이삭 줍고

집터에 심은 검정콩 메주콩 타작만큼이나

술 좋아하더니

 

지난해부터 추석이면

달무리 두레 방석에 앉아

두 내외 말술을 나누고 있다

 

- 김황흠 시집 『책장 사이에 귀뚜라미가 산다.

 

 


 

김황흠 시인

1966년 전남 장흥에서 출생. 한국방송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수료. 2008년 《작가》 신인상을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숫눈』(문학들, 2015)과  『건너가는 시간』(푸른사상, 2018) 시화집 『드들강 편지』(문학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