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 시인(영등포) / 별지기
별을 따고 싶어 별 따라갔다가 별만 보고 돌아왔지요. 지척에서 잡힐 듯 잡힐 듯 가까운 별은 언제나 화려한 유혹이었지요. 창문을 열면 아름다운 별이 눈에 들어옵니다. 창문을 닫아도 별은 반짝입니다. 눈을 감으면 더욱 환하게 비추어 놓습니다. 잡으려니 더 멀리 있는 듯 달아나버립니다. 걸어가면 천천히, 뛰어가면 점점 더 빨리 멀어지곤 합니다. 출근할 때나 퇴근할 때도 별을 따라다녔습니다. 가장 높은 곳을 향하여 별을 쫓으며 별만 보고 살아온 날들 하루를 유성같이 산 날들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난 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 별은 누군가의 꿈이라는 것을 누군가의 절망 속에 핀 희망이라는 것을 당신도 나도 누군가의 가슴에 반짝이는 따듯한 별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요.
이기호 시인(영등포) / 문래동 철재상가
문래동 철재 상가를 지나가면 무쇠냄새가 난다. 강철봉을 자르는 그라인더 소음이 귓가에 떨어질 때 엉킨 심장의 불꽃이 축포처럼 치솟는 것을 볼 수 있다. 걷다가 잠시 고개를 돌리면 떡가래처럼 고열을 앓다가 빠져나온 날카로운 칩이 허공을 떠돌다 속이 허한 몸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볼 수 있다. 강철봉이 잘리는 순간부터 철재 상가는 아침이 시작된다. 불꽃처럼 날카로운 칩이 하늘을 가르며 비행하는 날은 문래동 밤거리엔 어김없이 반짝이는 별로 가득하였다. 번쩍번쩍 뜨거운 별로 북적였던 문래동 골목길에 무시로 쇠를 먹어치웠던 불가사리 언제부터 보이지 않는다. 끼이 끽, 철갑 옷을 두른 두터운 손도 보이지 않는다. 기계 소리 대신 한숨 소리 땅이 꺼지는 날 늘어나면서 축포로 밤하늘에 은하수 만들어 내던 별도 사라지고 없다. 용광로처럼 풀무질하던 심장도 얼어붙은 채 입을 굳게 다문 철재 상가만 하나 둘 더 늘었다. 언제 다시 돌아올까 별이 빛나는 밤에, 그 영화로움 쿵쿵 쿵, 집집이 무쇠 냄새 맡으며 밤거리를 요란스럽게 휘젓고 돌아다닐 불가사리 나타나는 날 섬광처럼 뛰어오른 빨간 칩이 밤하늘 가득 메우는 날 상가마다 반짝반짝 빛나던 반딧불 아름답게 밤하늘 수놓으며 끝없이 날아다니는 날.
이기호 시인(영등포) / 전선前線을 가다
휴대전화기를 소지한 부정행위자는 향후 3년간 본 회 주관의 시험에 응시할 수 없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시험장에 매설해 놓은 대인지뢰, 전전긍긍 폭발할지 몰라 곳곳에 비통한 언어의 철조망을 꽂는다. 쓰나 미처럼 밀려든 학원광고 전단을 헤치고 징검다리처럼 앉아 있는 수험생들 앞에 경계의 울타리를 쳐놓았다. 본부로부터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었다. 드디어 두려운 눈빛들과 불꽃 튀는 교전을 시작한다. 치열한 삶의 전선前線을 향하는 사람들 앞에서 마음의 불구를 입지 않도록, 눈물짓지 않도록 각개전투 장으로 내몰아 간다. 얼마 전, 생이 두 동강이 나버린 전쟁고아의 상흔이 서해 연평도에 고스란히 떠올랐을 때 그때, 얼마나 많은 밤잠을 설치며 눈물지었었는가. 포탄이 터지는 전쟁터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자 시련을 이겨낸 가장 훌륭한 병사이다. 떳떳이 박수를 받을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잎 떨어지는 생의 가을이 턱밑으로 숨 가쁘게 치켜 올라왔을 때 젊음의 어느 하루는 정말 뜨거웠노라 말할 수 있도록 -17도의 영하날씨를 뚫고서 시험장에 들어온 처절한 수험생들에게 송곳 같은 언어로 뾰족한 가시를 내뱉는다. 아름다운 병사들의 삶에 대해, 매설해 놓은 대인지뢰의 파괴력에 대해 긴요한 설명을 한다.
이기호 시인(영등포) / 감기
아, 그분이 화가 난 채 나를 찾아오시면 왜 하필 나란 말인가 푸념하지 마라. 소주 한 됫병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시비를 걸어오더라도 그분만큼은 사랑으로 맞이할 지어다. 왜 다짜고짜 시비조냐고 는 묻지 마라. 오미자차를 보리차처럼 끓여서 꿀을 조금 넣은 꿀물이라도 따뜻하게 내올 일이다. 그분의 됨됨이 굳이 논할 필요까지 있을까? 가식도 없으며, 꾸밈도 없으신 분이시다. 태생이 앞뒤 구분 짓는 분이 아니므로 시각(時刻)도 구분 못 한 채 왜 손님처럼 찾아오느냐고 문전박대하지 말지어다. 살다가 행여, 그분이 찾아오시면 집안에서 가장 따뜻한 아랫목으로 정중히 모셔놓고 시집갈 때 준비한 원앙금침 포근히 깔아서 대추, 모과, 생강차로 줄줄이 봉양하고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으시고 열을 내시면 가까운 한의원에 들러서 십전대보탕이라도 끓여 정성을 다해 내올 일이다. 집안에 머무는 한 사흘 동안은 삼시(三時) 세 때 문안 꼭꼭 여쭈어 불편함은 없으신가. 친절히 안부 인사 꼭꼭 여쭙고 그 속을 헤아려 이해하고 정중히 받들어야 한다. 대접이 소홀하면 엉덩이가 더욱 무거워지는 분이시니 떠나시기 전까지 마음으로 모셔 볼 일이다.
이기호 시인(영등포) / 빙하기
거실 어항에 저녁 어둠처럼 흔들거리는 수초를 사 넣었다. 열대어 다섯 마리, 앞서거니 뒤서거니 수면으로 치솟아 오르며 구름 떼를 쫓는다. 어항 속 열대어는 여전히 평온하다. 말초신경처럼 예민한 것은 제 속에 화火를 품고 있는 전열 수온계뿐, 어항의 수초가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에 맞춰 길을 낸다. 비단길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열대어가 줄지어 수온계 주위를 유영하며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다. 가을을 버린 여름과 겨울의 경계에서 봄이 와 있는 것처럼 따뜻한 빛이 맴돈다. 몸이 선선하다.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칼바람이 거실의 잠자던 공기를 위로 밀쳐내며 들어선다. 수온계가 황급히 켜진다. -13도의 바깥세상의 사태를 짐작하기에는 5 t의 유리가 너무 두껍다. 물빛이 차오르는 수온계 주위로 태양계 행성들이 몰려든다. 행성 주위로 별똥이 떨어지며 수초 위, 어둠을 만들어 낸다. 현관 앞, 차단기가 내려간 걸까? 행성들이 블랙홀 속으로 속속 빨려 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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