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민 시인 / 빈집
빈집이 허수아비처럼 주인 없는 돌밭을 지키고 섰다 돌은 밭에서 쉼 없이 돌을 낳았고 단칸방이 비좁아 빈집으로 굴렀다 그렇게 달려 들어간 돌들이 똥구멍에서 목구멍까지 빈집을 채웠다
빈집은 돌을 품었다 천장에서 새는 울음을 빠짐없이 깠다 돌들의 꿈을 대신 꾸느라 제 꿈은 없었다
안팎이 일생이 돌밭이었다가 돌무덤이 된 빈집
빈집은 돌들의 꿈을 공중에 차곡차곡 쌓고 있다 빈집이 쌓고 빈집이 쌓여 저 하늘이 나타났다 돌가루가 씨앗처럼 뿌려져 별들이 태어났다
별들은 집채만 한 밤하늘에 뿌리내린 빈집 그중 제일 가깝고 미더운 별, 달은 가장 눈에 밟히는 돌
달은 도망치고 싶을 대마다 구름을 따라 왔다가 앉았다 가곤 한다
빈집이 그리울 때마다 버려진 밭의 주인처럼 무릎으로 돌무지를 일구다가곤 한다
돌은 달의 품에서 울다가도 콧등의 땀을 달빛으로 닦으며 볼을 비비고 어깨를 붙이고 손 꼭 잡고 빈집의 틈을 메워 나간다
빈집이 불타기 시작한다 붉은 눈시울이 돋운 심지의 달빛 돌과 돌이 부딪혀 내뿜는 찰나들의 눈빛
안채와 사랑, 지붕과 쪽마루까지 옮겨붙어 집값이 몸값인 그를 태우고 활활 솟아오른다
수천 리 밖 우주에서도 보일 정도로 붉게 타오르는 개구리울음이 마당부터 뒤란까지 환히 밝힌 밤
가득한 빈집은 이고 지고 메고 품은 돌들을 다 부리고 먼지처럼 가볍고 연기처럼 투명한 발걸음으로
꿈같은 공중으로 돌아간다
-시집 『극지에서 살다 적도에서 만나』, 《시산맥》에서
박동민 시인 / 트리스탄
왕잠자리 유충은 올챙이 잡아먹고 개구리는 왕잠자리 성충 잡아먹는다
당신은 잊힐 권리가 있고 나는 기억할 의무가 있다
사고였다 새들은 경적을 울리며 갓길에서 웃었다
예고 없이 끼어든 안개 속 동전 같은 바퀴가 긁어낸 즉석복권
당신은 하루 권장량의 웃음을 건넸고 나는 매일 적당량의 위로를 삼켰다
개암나무 향이 나는 자유로 귀뚜라미 울음으로 체온을 가늠하는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늘 제자리다 그때 그 자리 두루미들이 밭장다리로 걸으며 하늘에 남긴 스키드마크처럼 선명한 너의 냄새
몸 어딘가에서 새어 나온 유통기한 지난 숫자들
바뀐 전화번호는 당신의 의무 바꾸지 않은 비밀번호는 나의 권리
너는 잊힐 의무가 있고 나는 기록할 권리가 있다
- 『극지에서 살다 적도에서 만나』(시산맥, 2021)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기호 시인(영등포) / 별지기 외 4편 (0) | 2022.09.18 |
---|---|
박청륭 시인 / 반딧불이 외 1편 (0) | 2022.09.18 |
김경철 시인 / 바람의 사랑 외 1편 (0) | 2022.09.18 |
마종기 시인 / 어머니의 세상 외 1편 (0) | 2022.09.17 |
권순자 시인 / 안개 행적 (0) | 2022.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