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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건호 시인 / 바람과 깃발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2.

박건호 시인 / 바람과 깃발

 

 

깃발이 바람을 만나면

춤을 추었고

깃발이 깃발을 만나면

피가 흘렀다

 

끝내

어느 한 쪽은 찢어져야

안심할 수 있는

우리의 산하

 

하늘에는

두 개의 깃발이 있었다

별들이 펼쳐 놓은 이야기는

하나 뿐인데

 

사람들은 가슴속에 활화산을 숨겨 놓고

천둥소리를 숨겨 놓고

우주질서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념과 사상이

피보다 진했던 우리의 반세기

어지러운 소용돌이 속에서

 

깃발이 바람을 만나면

춤을 추었고

깃발이 깃발을 만나면

피가 흘렀다

 

 


 

 

박건호 시인 / 오리고기 앞에서

 

 

숯불 위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오리고기를 보면서

세 명의 평화주의자가 군침을 흘린다

생명의 존엄성을 얘기하면서도

속으로는 상추에 싸서 먹을까

얇게 썰어 놓은 무에 싸서 먹을까

그냥 소금에 찍어 먹을까

아주 탐욕스런 계획들을 하고 있다

그들의 양심은 고기가 익으면서 끝나고

모든 누명은 술이 뒤집어쓴다

이 거룩한 사나이들은

눈동자에 피빛 노을이 물들면

절벽에 몸을 던진 삼천궁녀를 그리워한다

목숨을 끊으면서 항거했던 울분은

강물에 씻겨갔나

한 나라가 망한 것을 천년 뒤에

슬퍼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오로지 절벽으로 몸을 던진

삼천 명의 궁녀들만

숯불 위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삼천 점의 고기가 되어

군침이 흐르게 할 뿐이다

 

 


 

 

박건호 시인 / 게의 속살을 파먹으며

 

 

게의 속살을

파먹어 본 사람은 안다

단단한 것일 수록

쉽게 허물어진다는 것을

속살을 보호하기 위한 껍질은

무엇인가에 부딪치면

균열이 생겼다

균열의 틈 사이로 들어와

누군가 나를 파먹는다

단단한 껍질을 믿었으나

단단한 껍질은 믿을 것이 아니었다

부딪치고 깨어지는 연습도 없이

나는 허물어졌다

허물어지고 허물어졌다

게의 속살을

파먹어 본 사람은 안다

단단한 것일 수록

쉽게 허물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사랑이 아닌

어떤 제국의 힘으로도

우리의 속살은

보호할 수 없음을

 

 


 

 

박건호 시인 /

 

 

나는 유행가 가사를썼다

돈이 될 것 같아서

첫사랑의 여자를 어디론가 보내버리고

쓰러지기 직전까지 골을 혹사했다

그 사이 여러 명의 신인가수가 탄생했다가 은퇴를 했고

먹고 사는 데야 지장은 없지만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다

가사를 써 준 사람들 앞에서 침을 겔겔겔 흘리다 보면

무엇인가 자꾸 더러웠다 더러워서

더럽지 않은 곳을 찾다가 그만 똥을 밟았다

그때 어떤 시인이 왈

내가 쓴 시는 요즘 쓰는 다른 시의 경향과 다르고

시대적 감각이 뒤진다고 말했다

나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다시

유행가 가사를 썼다

작곡가들이 너무 시적이라고 한다

다시 시를 썼다

시인들이 너무 유행가 가사적이라고 한다 젠장

짖어라

 

 


 

박건호 시인 (1949~2007)

1949년 강원 원주시 출생. 작사가. 호는 토우(土偶). 데뷔-1972년 가요 '모닥불' 작사. 1985. 한국방송협회 주최 아름다운 노래 대상 수상. 2007129일 별세(향년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