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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보 시인 / 한가로운 날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2.

임보 시인 / 한가로운 날

 

 

그제는 혼례식에 참석했고

어제는 장례식에 다녀왔다

오늘은 아직 일이 없으니

몇 줄의 글을 읽으며 빈둥거려도 된다

 

내 자리가 높지 않아 찾아오는 이 없고

내 가진 것 많지 않아 욕심내는 이 없고

각별히 사랑하는 이 없으니 시새움 걱정 없고

지나치게 미워하는 이 없으니 원망에도 자유롭다

 

아침엔 세 평의 채소밭에 나가 물을 주고

낮에는 뜰의 풋고추, 씀바귀 잎을 따다

향긋한 된장에 찍어 물 만 밥을 씹는다

저녁엔 잘 익은 매실주 둬 잔이 기다리고...

 

늙은 소나무엔 아침저녁 까치들이 드나들고

감나무 매화나무엔 종일 참새들이 드나들고

호박덩굴엔 호박벌, 능소화엔 개미 떼들

찾아오는 사람은 없어도 온종일 손님들로 북적댄다

 

세상에 지천인 이 평화를

나누어 가질 사람이 없어 민망하다.

 

- 임보 잠언시집< 山上問答 > 2016

 

 


 

 

임보 시인 / 신 청산별곡

 

 

청산은 나를 보고

무겁게 살라 하고

유수는 나를 보고

가볍게 살라 하네

청산과 유수를 보며

어이 살 줄 몰라라

 

청산은 나를 두고

쉬었다 가라 하고

유수는 나를 두고

서둘러 가라 하네

청산도 유수도 두고

내 맘대로 하리라

 

 


 

 

임보 시인 / 비 오는 날

 

 

비여, 내려라

많이많이 내려라

 

인간의 악한 마음

말끔히 씻어내고

 

지상의

병든 장벽들

다 허물어 버려라

 

하늘도 우렁우렁

큰 울음 울더니

 

소나기 눈물 비를

홍건히 쏟는고야

 

덕분에

따라서 울기

괜찮은 날이로고

 

 


 

임보(林步) 시인

1940년 전남 승주군 출생. 본명: 강홍기(姜洪基).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국민대학 대학원 국문과 졸업.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한국현대시운율연구>로 문학박사 학위. 1962<현대문학> 추천으로 시인 등단. 1974년 첫시집 <임보의 시들>. 이후 2011<눈부신 귀향> 14권의 시집 및 많은 동인지와 시론집 펴냄. 2014년 제30회 윤동주 문학상 수상. 충북대 국문과 교수 역임. 현재 월간 <우리시> 편집인. 논저 한국현대시 운율구조론」『엄살의 시학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