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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경미 시인 / 오늘의 결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3.

김경미 시인 / 오늘의 결심

 

 

라일락이나 은행나무보다 높은 곳에 살지 않겠다

초저녁 별빛보다 많은 등을 켜지 않겠다

여행용 트렁크는 나의 서재

지구 끝까지 들고 가겠다

썩은 치아 같은 실망

오후에는 꼭 치과엘 가겠다

 

밤하늘에 노랗게 불 켜진 보름달을

신호등으로 알고 급히 횡단보도를 건넜으되

다치지 않았다

 

생각하면 티끌 같은 월요일에

생각할수록 티끌 같은 금요일까지

창틀 먼지에 다치거나

내 어금니에 혀 물린 날 더 많았으되

 

함부로 상처받지 않겠다

목차들 재미없어도

크게 서운해하지 않겠다

너무 재미있어도 고단하다

잦은 서운함도 고단하다

 

한계를 알지만

제 발목보다 가는 담벼락 위를 걷는

갈색의 고양이처럼

 

비관 없는 애정의 습관도 길러보겠다

 

 


 

 

김경미 시인 / 벗꽃 나무 아래서 사과하다

 

 

활짝 핀 벚꽃 그늘 밑을 지나다가

문득 생각했지요

 

내가 망쳤구나

그의 이십대를....

이토록 젊고 눈부실 그 사람 인생의 봄을

갑작스런 이별통보로

내가 엉망을 만들었구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그 젊음, 그 화창한 시간을

내가 그랬구나... 문득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때의 내 갑작스런 마음의 변화도

어쩔 수가 없었으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고 변명하면서

 

봄꽃 활짝 핀 그늘 밑에 잠시 멈춰 서서

미안했다고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그 사과 전하려 직접 만날 생각은

영원히 없지만

 

그 사람 어느 날 활짝 핀 벚꽃 아래를 지나다

날 떠올리지 않고도

그냥 뭔갈 다 용서하는 기분이 되길

 

옛일 따윈 다 잊고

지금 참으로 단란하고 행복하게 지내길

활짝 핀 청춘의 벚꽃나무 아래를 지나며

그렇게 내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해봅니다

 

첨언 (김미숙/KBS FM 가정음악) :

돌아보니 그때 그 사람, 그 사랑 때문에 내 눈부신 이십대가

너무나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웠구나, 하는 분들요...

 

근데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그 절망이나 고통에서 멀찌감치 떨어졌다는 증거겠죠...

 

그러니 이 화창한 계절을 빌어

내 청춘을 어지럽혔던 이별을 용서하고,

내가 어지럽혔던 누군가의 청춘에 잠시 사과하는 것도

이 봄날에 할 수 있는 좋은 일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김경미(金京眉) 시인

1959년 경기도 부천 출생. 한양대학교 사학과 졸업. 1983중앙일보신춘문예에 비망록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쓰랴(실천문학사,1989),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창작과비평, 1995), 쉬잇, 나의 세컨드는(문학동네, 2001)고통을 달래는 순서(창비, 2008) 등과 사진 에세이집 바다 내게로 오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