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인 / 오늘의 결심 라일락이나 은행나무보다 높은 곳에 살지 않겠다 초저녁 별빛보다 많은 등을 켜지 않겠다 여행용 트렁크는 나의 서재 지구 끝까지 들고 가겠다 썩은 치아 같은 실망 오후에는 꼭 치과엘 가겠다 밤하늘에 노랗게 불 켜진 보름달을 신호등으로 알고 급히 횡단보도를 건넜으되 다치지 않았다 생각하면 티끌 같은 월요일에 생각할수록 티끌 같은 금요일까지 창틀 먼지에 다치거나 내 어금니에 혀 물린 날 더 많았으되 함부로 상처받지 않겠다 목차들 재미없어도 크게 서운해하지 않겠다 너무 재미있어도 고단하다 잦은 서운함도 고단하다 한계를 알지만 제 발목보다 가는 담벼락 위를 걷는 갈색의 고양이처럼 비관 없는 애정의 습관도 길러보겠다 김경미 시인 / 벗꽃 나무 아래서 사과하다 활짝 핀 벚꽃 그늘 밑을 지나다가 문득 생각했지요 내가 망쳤구나 그의 이십대를.... 이토록 젊고 눈부실 그 사람 인생의 봄을 갑작스런 이별통보로 내가 엉망을 만들었구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그 젊음, 그 화창한 시간을 내가 그랬구나... 문득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때의 내 갑작스런 마음의 변화도 어쩔 수가 없었으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고 변명하면서 봄꽃 활짝 핀 그늘 밑에 잠시 멈춰 서서 미안했다고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그 사과 전하려 직접 만날 생각은 영원히 없지만 그 사람 어느 날 활짝 핀 벚꽃 아래를 지나다 날 떠올리지 않고도 그냥 뭔갈 다 용서하는 기분이 되길 옛일 따윈 다 잊고 지금 참으로 단란하고 행복하게 지내길 활짝 핀 청춘의 벚꽃나무 아래를 지나며 그렇게 내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해봅니다 첨언 (김미숙/KBS FM 가정음악) : 돌아보니 그때 그 사람, 그 사랑 때문에 내 눈부신 이십대가 너무나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웠구나, 하는 분들요... 근데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그 절망이나 고통에서 멀찌감치 떨어졌다는 증거겠죠... 그러니 이 화창한 계절을 빌어 내 청춘을 어지럽혔던 이별을 용서하고, 내가 어지럽혔던 누군가의 청춘에 잠시 사과하는 것도 이 봄날에 할 수 있는 좋은 일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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