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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수현 시인(예천) / 멍때리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20.

임수현 시인(예천) / 멍때리기

 

 

한강 고수부지에서 멍때리기 대회가 열린다

돗자리 하나 깔고

눈만 껌벅껌벅

잘하는 게 하나 없는 나도 자신 있다

 

창밖을 멍하니 보는데

가로등 전깃줄을 타고

고릴라가 휙휙

버스 위에는 좀비 떼가 달라붙어 있다

 

펼쳐 놓은 책을 선생님이 손가락으로 톡톡

뭐 하니? 물으셨다

선생님 제가 곧 대회에 나갈 거거든요

무슨 대회?

멍때리기 대회요

그런데 자꾸 딴생각이 나요

김민서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

다음 페이지 넘겨

넵! 선생님

그러고는 다시 멍

 

-시집 『악몽을 수집하는 아이』, 창비교육, 2022

 

 


 

 

임수현 시인(예천) / 한 다발

 

 

대각선으로 짧게 자르세요

꽃집 점원은 한 다발의 꽃을

내게 안기며 당부한다

 

목이 좁은 꽃병은 한 다발이 버거웠지만

 

그래서 불안

아름다운 물관

당신과

금붕어를 동시에 키우고 싶었나 봐

 

왜 자꾸 뻐끔뻐끔

숨이 찰까

 

오래가요?

오래가요!

질문과 답이 한 종이에 있는 오픈 북 시험처럼

처음 금붕어란 이름의 금붕어를 찾아 서로의 무늬를

지우면 더 오래 헤엄칠 수 있었을까?

 

우리가 함께라면

 

서로의 무늬로

비스듬히 어깨를 기대도 좋았을 거야

 

끝끝내 우리는 서로를 알 수 없어

뿌옇게 흐려질 수 있었다

 

어항도 되고 꽃병도 되는

이곳에서는

모두가 한순간이라고 말한다

 

시집 『아는 낱말의 수만큼 밤이 되겠지』, 걷는사람, 2021년

 

 


 

임수현 시인(예천)

경북 예천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2016년 《창비어린이》 동시 부문 신인 문학상, 2017년 《시인동네》 시 부문 신인 문학상, 2019년 문학동네 동시 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으로 『아는 낱말의 수만큼 밤이 되겠지』 『악몽을 수집하는 아이』와 동시집 『외톨이 왕』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