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황은주 시인 / 9개월의 불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7.

황은주 시인 / 9개월의 불안

 

 

 명랑한 사람들은 부메랑을 던졌고, 평온하게 잠들었다

 

 새로 들인 초가을 날의 염습殮襲은 화사했다 볼과 입술에 칠해진 맑은 분홍을 모래바늘로 간직했다

 

 노련한 마녀처럼 반복해서 주문을 외우고는 했다 돌아와돌아와돌아와

 

 태어난 지 9개월이 된 아이는 첫 번째 엄마가 안 보이면 두 번째 엄마를 찾는다

 

 그리고리력으로 아이는 9개월 만에 태어난다

 9개월 만에 안을 잃었기에 9개월마다 안을 찾는 태생을 얻었다

 

 불안의 주기가 오면 뜬 눈으로 밝히는 어둠이 많았다 불안했던 잠의 표식 유성의 은신을 뒤쫓는 명료해진 밤눈

 

 흔들리는 안을 찾아다녔다 지하계단과 공중관람열차와 정류장을 맴도는 기행

 뒤엉킨 궤도는 늘 처음으로 돌아왔고, 평온하게 잠들 수 있었다

 

 치밀하게 간격을 재면 사소한 감정들이 화사하게 말랐다

 고독한 소설과 우스운 삽화는 즐거운 골목과 비통한 창문은 절망적인 의자와 따뜻한 꽃다발은

 

 분홍기억은 색의 밝기와 모래의 시간 사이만큼 더 멀리 떠나갔다

 

 첫 번째 엄마가 안 보이면 두 번째 엄마도 없다

 

 


 

 

황은주 시인 / 말랑말랑한 외면

 

 

가장 먼 곳이 가장 잘 지워지는 곳이라 표시를 했다

 

회색 풍경이 얼마나 밝은지

얼마나 어두운지 몰라 지워야 했다

쓱쓱, 회색 고무지우개로 풍경을 문질렀다

 

풍경을 지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풍경을 뭉치는 것이라 표시했었다

 

남쪽에서 온 목이 긴 볕이 북쪽 그림자로 꺾이는 자리

표시된 사람은 늘 그런 곳에 서 있다

세 살 적 하얀 이빨과 하얀 향이 나던 이름

뒹구는 소급놀이 속에선

마흔 살의 민무늬 일기장과

시든 웃음졸기가 까맣게 타고 있었다

 

여울 없는 물웅덩이에 달이 고이면 달의 기억이 멀어진다고 표시했었다

 

달을 향해 주문을 속삭였다

사라지지마사라지지마사라져

공터로 회색 바람이 불어왔고

그 자리라는 표시만 남고 모두 지워진다

닳아버린 풍경, 닳아지지 않는 고무지우개

짙을수록 잘 뭉쳐져 옅을수록 장 뭉개져 古畵처럼 부드럽게 지워졌다

쓰다만 지우개는 재미가 없다

 

시간을 들지 않고서는 떠나지 마세요*

 

지워진 자리가 말랑말랑하다

회색을 건너면 다시 공터가 되는 눈 내리는 4월의 지도를 들고 가장 멀리 돌돌 말려 가고 싶다

 

*알랭 로브그리예 소설, '고무지우개' 중

 

 


 

황은주 시인

1966년 강원도 홍천에서 출생. 상명대학교 불어교육과 졸업. 2012년 《중앙일보》 제13회 중앙신인문학상 시부문에 「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 가 당선되어 등단. 현재 수원 동부학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