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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경란 시인 / 시인과 세잔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7.

문경란 시인 / 시인과 세잔

 

 

메마른 가슴 속

문자 쪼가리만 앵앵거린다

 

익기도 전에 썩어가는 사과들

썩는 사과는 계속 썩어

 

세잔은 붓을 던지고

벌떼들이 파고든 곳마다 고꾸라지는 단어들

 

입에서 구린내를 풍기며

물구나무를 서다 흘러내리는 문장들

 

M과 M′ 그리고 M″

W과 W′ 그리고 W″

 

단어들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린 문장들

 

깊어가는 신음 소리를 번역하는 소란한 키보드

 

어둠은 점점 영역을 넓혀가고

너는 시를 쓰고 나는 세잔을 쓰고

 

사과에서 흘러내리는 거품을 덜어내지 못하고

오늘을 펼친다

 

웹진 『시인광장』 2022년 8월호 발표

 

 


 

 

문경란 시인 / 노모포비아

 

 

널 놓치는 순간 계단에서 퉁그러졌고 몇 줄의 암호처럼 나비가 날았다 무수한 기억을 삼킨 난 누구일까 냉장고에서 머리를 꺼낸다 낯선 얼굴에서 눈물이 그렁하다

 

가까이 혹은 멀리서 드르륵 디르룩 우우웅, 환청이 귀를 흔든다 밤이 깊어갈수록 막다른 골목이 쌓이고 고독이 커간다 창 밖 나뭇가지는 나비춤을 추고 고양이는 더 많은 환청을 긁어대 가슴이 메슥메슥 눈이 흔들리고

 

저기, 목소리가 보이지 않으세요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울음들 끊어졌다 이어지고 고양이는 나비를 쫓느라 거친 혀로 공간을 깨운다 살얼음이 낀 말들

 

너를 켤 수 없어

 

여기는 섬이야 뒤뚱거려도 펭귄은 없어 유난히 긴 손가락이 꼼지락꼼지락 연초록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로 너를 쓰고 있어 안녕!

 

나의 하느님은 아침과 함께 페이지 밖으로 나가고 깨진 폰에 매달린 눈빛은 처끈처끈하다 놔! 희뜩거리는 눈이 귀중중한 대화방을 맴돈다

 

몸을 감싼 핏줄에 꽃이 핀다

 

*노모포비아(No mobile-phone phobia) 스마트폰이 없을 때 불안감을 느끼는 증상

 

 


 

 

문경란 시인 / 코로나 시대 사랑법

 

 

 엄마는 주머니가 없는 아버지를 버리고 봉제인형을 안고 또 다른 아버지를 찾으러 교회당으로 간다 교회당 촛불에서는 법당 냄새가 난다 찬송가인지 찬불가인지 모르는 웅얼거림과 엄마가 뿜어내는 숨 사이 터져 나오는 아버지, 이 아버지가 그 아버지인지 그 아버지가 이 아버지인지 봉제인형은 눈만 껌벅거리고

 

 엄마는 밤을 꼬박 밝혀 봉제 인형에 눈을 달아준다 봉제 인형은 엄마 대신 아버지를 찾으러 간다 아버지를 찾지 못한 봉제 인형은 눈이 모자란다며 더 많은 눈을 달아달라(고) 조르고 엄마는 자신의 눈까지 떼어 봉제 인형에게 달아준다 이 눈 저 눈, 눈으로 덮인 봉제인형은 너무 많은 아버지들 틈에서 아버지를 찾지 못한다 이 아버지가 그 아버지 같고 그 아버지가 이 아버지 같고

 

 교회당 종소리에서는 밥 냄새가 난다 긴 줄 끝에 봉제 인형도 줄을 선다 화가 난 엄마는 봉제인형을 기차역에 보초로 세운다 봉제 인형은 기차역 종이 박스 사이 위태롭게 낀 아버지를 놓친다

 

 깜깜한 교회당 안 엄마인지 아버지인지 엄마가 아버지 같고 아버지가 엄마 같은 엄마가 쫓아낸 건지 아버지가 쫓겨난 건지 교회당 엄마가 노숙 중인지 아버지가 노숙 중인지 봉제인형은 눈을 갈아 끼우고

 

 


 

 

문경란 시인 / 해동 이발관

 

 

이발사 아버지는 눈이 나빠

엄마의 목소리를 자른다

 

쥐가 파먹듯 허공을 자르는

아버지의 가위

 

해가 떠도

비는 오고

 

동생은 가위바위보 놀이에서 늘 주먹을 낸다

부수고 싶은 가위가 있다

 

이발소에는 철거예정 딱지가 붙고

울퉁불퉁한 나이만큼

잘린 것들은 버려지고

 

아버지는 깎는다를 민다고 한다

밀어내는 건 불도저

가위를 간다

아버지는 불도저인 척 나를 밀어버리고 동생을 깎고

엄마는 목소리조차 잃었다

 

잘려나간 시선들

잘린 사람들은 거리를 떠돈다

 

엄마는 아버지보다 물건 값을 잘 깎는다

엄마의 깎는 기술에

체면이 깎인 아버지의 무게는 얼마나 가벼울까

 

아래에서 위로 혹은 앞에서 뒤로

옆머리의 상큼함에

손님은 모자란다 하고 아버지는 남는다고 한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아버지의 가난을 예언한 점쟁이가 있었다

 

눈이 오면 가위손이 살아온다는 전설이 있다

천 개의 손에서 자라는

아버지의 가위는 공작새로 부활하고

 

2022년 《미네르바》 봄호 등단시

 

 


 

문경란 시인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22년 《미네르바》 봄호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