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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주선미 시인 / 눈썹 문신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7.

주선미 시인 / 눈썹 문신

 

 

중오를 담은 어느 무기가

이만큼 무서울까?

알이 단단하게든 상수리 열매 얻으려고

솔숲을 뒤지다만 송충이

꿈틀거리는 송충이만큼

온몸에 고압의 전류를 흘린 것은 없다

 

까까머리처럼 말끔하게 깎여있는

금강송 숲을 보았다

솔 향기조차 맡을 수 없는 소나무 숲

살 터전을 잃어버린 송충이들은 어디로 간 걸까

 

꿈틀거리는 송충이 징그럽다지만

단 며칠 북적거릴 올림픽 위해

수백 년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 준

소나무 숲에 날카로운 톱날을 들이대다니

 

소나무가 살던 터전에 인간 송충이들이

한 몫 챙기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화장대 앞에서 거울을 보다

문득

송충이 닮은 눈썹을 만져 본다

 

 


 

 

주선미 시인 / 냉장의 시간

 

 

더 이상 이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

 

깊은 바닷속을 비집던 붉은 비린내가

녹아 풀어지는 얼음덩이와

아귀다툼하는 곳을 벗어나

처음으로 안식을 느껴본다

 

죽거나 죽이거나 두 가지 선택밖에 없는

바닷속 무림을 떠나

잘 구획된 적층의 세계에

지친 몸을 둔다는 건 큰 행운이구나 했더니

 

뒤쪽으로 난 긴 꼬리가

한낱 아이들 발에 걸려 끊어졌다

짜릿한 전기가 끊어진 순간

카세트 테잎 늘어지듯

따뜻하게 풀리는 얼음의 슬픔을 기억한다

힘겹게 굽은 허리가 뭍으로 나와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법을 잊은 자들

제 손으로 마련하지 않은 안락한 자리는

무덤이다

먼 바다로 돌아가는 꿈을 꾸며

도마 위의 물고기 파다닥 허공을 친다

 

 


 

 

주선미 시인 / 겨울에만 피는 꽃

ㅡ연탄을 보며

 

 

깊은 땅 속에서

차오르는 숨을 삼키느라

검게 변해 버린 푸른 잎사귀

 

한때는 밀림 속에서

맹수들의 먹을 것을 마련해 주었고

피난처가 되기도 했었다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은

낮은 곳의 사람들과 숨을 쉬기 위해

온몸을 불사르는 검은 흙 한 덩이가 되었다

 

하얀 재로 변해

쓸모없는 땅에 버려져야 할,

 

그 버려진 땅에서 다시

이 세상을 뜨겁게 덥혀줄 누군가가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주선미 시인 / 충전기

 

 

그를 위해서라면

오후 내내 모은 몇 줌의 짜릿한 전류쯤

아낌없이 내 주어도 좋다

바닥이 훤히 보이도록 다 퍼주어

다시 허기에 시달린다 하여도

그가 잃어버린 말을 되 찾을 수 있다면

내 몸이 얇아져 홀쭉해져도

보는 것만으로 흡족하다

하루 종일 사람들과 입씨름하느라

열에 더 들떠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 그를 보면

내 가슴이 먼저 아프다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맛집을 구석구석 돌아다니고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 주느라

정신을 쏙 빼놓은 채

힘에 겨워 지쳐가는 그에게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보낸다

오늘은 노래 부르는 소리마저

토방 한구석에 놓아 둔 쪽파처럼 늘어졌다

그를 일으키려면

바닥에 남아있는 전류 한 모금까지

짜릿한 혀로 퍼 올려야 한다

욕망이 목울대까지 다 채워지고 나면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게 돌아설 것이지만

그의 몸이 불덩이가 될 때까지

따스한 입김을 불어넣어주고 싶다

물병이 바닥까지 비우면서 갈증을 채워주듯

그를 위해 나를 아낌없이 던지고 싶다

 

 


 

 

주선미 시인 / 고춧대 태우던 날

 

 

숨이 멈춘 지 오래된 것 같은

바짝 마른 고춧대를

늙은 농부가 제단처럼 쌓았다

플라스틱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일제히 일어선 재들이

문상객 없는 화장터에

성긴 눈발처럼 날아다녔다

그래도 핏줄은 남겼나보다

말라비틀어져 쭈글쭈글해진

색깔도 하얗게 변해버린 고추를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잘게 부쉈다

다 타고 남은 유골처럼 희뿌연 가루를

논바닥에 뿌렸다

점점 어두워지던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재로 사라진 줄 알았던 것들

붉은 꽃이 무성하게 피어났다

 

2017년《시와 문화》신인상 등단시

 

 


 

주선미 시인

충남 태안 출생. 2017년《시와 문화》신인상 등단. 시집 『안면도 가는 길』 『일몰, 와온 바다에서』 『통증의 발원』 『플라스틱 여자』가 있음. 《시와 문화》2019 젊은 시인상, 충남문화재단창작기금 수혜. 현)《시와문화》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