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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미령 시인 / 새건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7.

김미령 시인 / 새건물

 

 

공터에 새로운 건물이 섰다.

 

매일 지나는 길인데 한참 후에야 알게 된 건 공터를 가리고 있던 공터 그림 때문이다.

 

새건물에는 새 직원이 들어가 일을 하고 그것은 사람을 기억하지 않는 깨끗한 일

 

새건물이 오래된 동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하지 않지만 알고 나면 금방 망할 것 같다.

 

창들이 마주 보고 있고 어둠은 벽 사이마다 비껴서 있는데 어디쯤 서 있어야 소문이 되는지 알 수 없어서 블라인드를 쳤다.

 

온 동네가 다 빠져나간 휴일엔 한 사람이 늦도록 거기 있는지 불을 죄다 켜 놓아서

 

새건물이 보이지 않는 골목 안에서 가려운 곳을 긁느라 혼자 시원했다.

 

 


 

 

김미령 시인 / 계단이 많은 실내

 

 

 네게 가는 도중에 너 비슷한 사람을 본다 그는 그 비슷한 사람들과 모여 속삭이다 금방 헤어지는데

 그중 한 사람이 나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여러 개의 복층으로 이루어진 높은 천장 아래

 서로 다른 모양의 계단과 크고 작은 복도가 하나의 단면으로 읽혀지는 순간의

 

 너의 위치

 

 너는 동쪽 계단을 내려가고 나는 북쪽 계단을 올라와 우리가 만나기 직전일 때

 계단의 끝에서 또 다른 공간이 생겨난다면

 나는 다시 어디로 연결될 것인가

 

 우리가 동시에 여기 있다는 소문은 정말인지 전화 속 네 목소리는 물속인 듯 먹먹하게 들리고

 

 내 입속은 텅텅 울리는데

 

 아무래도 옆에 걸린 액자를 로비 쪽으로 우르르 떨어뜨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면 움직이던 계단도 멈추고 오르내리던 걸음들도 공중에서 일제히 멈춰

 여러 겹의 기둥과 기둥 사이를 일직선으로 통과한 눈빛이 서로 반대편의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하게 될 순간이 올 것이다

 

 빙고! 하고 낮게 탄식하게 될

 흔한 미래

 그러다 꿈에서 깬 듯 금방 발을 옮기겠지만

 

 금세 계단이 다시 움직여서 우리는 또 헤매게 될 것이고

 우리의 자유는 거기서부터

 새로 시작되는데

 

 


 

김미령 시인

1975년 부산 출생. 부경대 국문학과.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우리가 동시에 여기 있다는 소문』 『파도의 새로운 양상』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