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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병일 시인 / 명랑한 남극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7.

이병일 시인 / 명랑한 남극

 

 

황제펭귄 수컷은 한번 품은 알을 놓지 않는다, 겹겹이 휘갈기는 눈발은 까다롭지만 단순히 부화의 학습이 녹슬어간다.

 

추위를 견디지 못한 수컷들이 알을 놓치기도 했다. 누구도 이 죄를 함부로 물은 적이 없다.

 

화염병같이 아름다운 노을이 그것을 방관했으니, 날개 짧은 자들의 해탈

은 저 부화 방법에 있으니, 오늘은 건조한 눈발 역시 양지바른 곳을 찾는

다.

 

어떤 성실함도 없이 그냥저냥 겨울밤을 버티는 황제펭귄들, 사타구니 속에서 알의 안부를 묻지 않는다. 다만 허들링*의 경계에서 난생처음 오르가슴을 느낀다.

 

그러나 먹이를 채집하고 돌아온 암컷이 길몽을 집어올 때, 수컷들은 무심히 깨진 알의 몰골을 쪼아 먹기 시작한다.

 

뼛속까지 궁핍과 공포가 박혀 있는지, 부리에 묻은 피냄새 그리고 원정 다녀온 암컷의 찢긴 깃털이 쨍쨍 빛난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남극의 세계는 이처럼 눈부시게 아름답도록 명랑하

다.

 

* 허들링 : 황제펭귄들이 남극의 눈폭풍과 추위를 견디기 위해 몸을 밀착하는 행동.

 

 


 

 

이병일 시인 / 투견의 그것처럼

 

 

저물 무렵, 우리 안의 투견

느물느물 더럽게 죽어간다

똥이 가물가물 삭듯이 그러나

피비린내 아직 살아 있지만

눈가의 똥파리들이

동공 풀린 눈동자에 박힌 저승을 빨아먹는지

작은 눈을 요리저리 굴린다

불한당의 주린 입은

죽어도 매초롬하게 못 죽는다

투견의 그것처럼 더위도 힘 빠질 무렵,

질컥하고 끈끈한 피오줌이

칸나의 꽃술로 옮겨 붙어가고 있다

칸나의 환함으로 거듭 태어나고 있다

칸나의 저녁이

개밥그릇 테두리 이빨자국을 핥을 때

그 반짝임의 깊이로 투견의 나이를 세어본다

 

 


 

이병일 시인

1981년 전북 진안에서 출생.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중앙대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 학위. 2005년《평화신문 신춘문예》와 2007년 《문학수첩》신인상 시 당선.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희곡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옆구리의 발견』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이 있음. 2014. 수주문학상 시부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