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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민채 시인 / 명자 자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7.

김민채 시인 / 명자 자리

 

 

명자꽃잎 하나가 거미집에 내려앉자

거미가 살며시 비켜 앉는 것을 보았다

집의 장력을 견디느라

플라타너스 어깨가 한쪽으로 기운다

빗줄기가 몇 번 꽃잎을 때리고 갔다

바람이 집을 흔들고 갔다

그렇게 맞고 흔들리면서 꽃잎은

집과 하나가 됐다

거미는

평생의 가장 멋진 집을 손에 넣고도

부처가 되려는가

요지부동 눈만 굴리고

열한 시 방향

모든 걸 맡겨버린 꽃잎의 흔들림

환한 그 자리

 

꽃은 떨어져도 꽃이었다

 

-시집 『노랑으로 미끄러져 보라』(상상인, 2022) 수록

 

 


 

 

김민채 시인 / 기둥 선인장

 

 

몸피를 줄이고 있었어

열성인 아이는 겨울이 뭔지도 몰랐지

배를 등에 붙여도 허리가 자꾸 굽었어

 

그 아이에게 매일 말을 걸었어 그럴 때마다 바짝 성깔을 세워 가끔 손등에 콕 처박힌 성질머리 빼내느라 반나절을 쓴 적도 있다니까 그 아이는 아픔을 먹고 산대 접도를 들었다 놓았다 실꾸리를 감았다 풀었다 목줄 따는 일은 식은 죽 먹기라며 습한 골짜기를 더듬어

 

심술통이 꽃을 내는 구멍이 될 수 있다는 건 알아도

모래 속에 숨겨둔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이 꽃이 된다는 건 모를 거야

가시는 모래톱을 기억하고 있어

구불구불 아프고 선명한 내일

 

검지에 돋아난 붉은 꽃

 

덩치 큰 남자가 덩칫값도 못 하면서 그 아이를 탐내 겨우내 살을 뺀 아이에게 새 옷 입히며 달래고 어르느라 진땀 빼는데 기어이 손가락에 붉은 꽃 피우고서야 고분고분해지는 비릿한 맛 입안에 엉겨 가시질 않아

 

아타카마 사막에는 모래풍이 불 거야

늙은 사막 쥐가 느리게 기둥을 오르고

하면夏眠에 들었던 땅다람쥐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가시와 가시 사이

피톨 세우며 노랗게 몰입 중인 꽃봉오리

 

겨울이 환한 노랑으로 사라지겠네

 

-시집 『노랑으로 미끄러져 보라』(상상인, 2022) 수록

 

 


 

김민채 시인

2008년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빗변에 서다』 『노랑으로 미끄러져 보라』가 있음. 제18회 푸른시학상 수상. 2022년 인천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