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채 시인 / 명자 자리
명자꽃잎 하나가 거미집에 내려앉자 거미가 살며시 비켜 앉는 것을 보았다 집의 장력을 견디느라 플라타너스 어깨가 한쪽으로 기운다 빗줄기가 몇 번 꽃잎을 때리고 갔다 바람이 집을 흔들고 갔다 그렇게 맞고 흔들리면서 꽃잎은 집과 하나가 됐다 거미는 평생의 가장 멋진 집을 손에 넣고도 부처가 되려는가 요지부동 눈만 굴리고 열한 시 방향 모든 걸 맡겨버린 꽃잎의 흔들림 환한 그 자리
꽃은 떨어져도 꽃이었다
-시집 『노랑으로 미끄러져 보라』(상상인, 2022) 수록
김민채 시인 / 기둥 선인장
몸피를 줄이고 있었어 열성인 아이는 겨울이 뭔지도 몰랐지 배를 등에 붙여도 허리가 자꾸 굽었어
그 아이에게 매일 말을 걸었어 그럴 때마다 바짝 성깔을 세워 가끔 손등에 콕 처박힌 성질머리 빼내느라 반나절을 쓴 적도 있다니까 그 아이는 아픔을 먹고 산대 접도를 들었다 놓았다 실꾸리를 감았다 풀었다 목줄 따는 일은 식은 죽 먹기라며 습한 골짜기를 더듬어
심술통이 꽃을 내는 구멍이 될 수 있다는 건 알아도 모래 속에 숨겨둔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이 꽃이 된다는 건 모를 거야 가시는 모래톱을 기억하고 있어 구불구불 아프고 선명한 내일
검지에 돋아난 붉은 꽃
덩치 큰 남자가 덩칫값도 못 하면서 그 아이를 탐내 겨우내 살을 뺀 아이에게 새 옷 입히며 달래고 어르느라 진땀 빼는데 기어이 손가락에 붉은 꽃 피우고서야 고분고분해지는 비릿한 맛 입안에 엉겨 가시질 않아
아타카마 사막에는 모래풍이 불 거야 늙은 사막 쥐가 느리게 기둥을 오르고 하면夏眠에 들었던 땅다람쥐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가시와 가시 사이 피톨 세우며 노랗게 몰입 중인 꽃봉오리
겨울이 환한 노랑으로 사라지겠네
-시집 『노랑으로 미끄러져 보라』(상상인, 2022)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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