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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신원섭의 나무와 숲 이야기] (13) 숲은 몸과 마음, 그리고 영성을 키운다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6.

[신원섭의 나무와 숲 이야기]

(13) 숲은 몸과 마음, 그리고 영성을 키운다

숲 체험 즐기고 생태맹 극복하자

가톨릭평화신문 2022.08.14 발행 [1674호]

 

 

 

 

숲에 가면 앞뒤 가리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정상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 있다. 운동선수가 아니라면 나는 이런 숲 이용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숲은 우리가 일상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지 못한 것을 경험하는 장소이다. 또한, 현대인은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별로 없는 삶을 살기에 숲은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숲은 온갖 호기심과 관찰의 보물창고이기도 하다. 숲의 풀, 나뭇잎, 야생화, 곤충, 야생 동물들…. 이 모든 것 하나하나가 신비하고 경이로운 대상이다. 숲에 와서 이런 것들을 지나치고 그냥 땀만 흘리고 가면 보물을 옆에 두고 지나치는 것과 같다. 숲에서 이들과 교류한다는 것은 인공물에 찌들었던 나의 몸과 마음을 조화롭게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다.

 

세상을 멀리하고 기도와 극기로 생활한 성 안토니오는 ‘은수 생활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성인은 체계적인 공부는 하지 않았으나 기도와 묵상을 통해 지혜뿐만 아니라 은총과 품위를 지닌 분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철학자 한 사람이 찾아와 거들먹거리며 “수사님, 독서의 위로 없이 어떻게 고통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안토니오는 “선생님, 자연과 숲이 바로 책입니다. 저는 자연과 숲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글을 읽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바로 숲은 세상의 이치와 생명의 원리를 깨닫게 하는 생생한 교과서이다.

 

글을 모르는 사람을 문맹, 컴퓨터를 모르는 컴맹이라고 부르듯, ‘생태맹’이란 말이 한때 대두된 적이 있다. 그러나 생태맹은 문맹과 컴맹과는 달리 매우 광범위하며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개념이다. 생태맹은 단순히 자연이나 생태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지식 부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처한 각종 환경 문제와 위기의 근원이 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와 인식이 부족한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생태맹이란 자연과 환경에 대한 지식의 결여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녀야 할 생명 현상에 대한 호기심, 경외감, 생명체나 생명현상에서의 느낄 수 있는 감성의 결여를 뜻한다. 따라서 생태맹이 극복되지 못하면 생명의 중요성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다른 사람 또는 주변의 환경과 함께하는 조화로운 삶을 살지 못한다.

 

모두가 인지하고 있듯이 우리 교육의 문제는 책상에서 달달 외우고 시험만 잘 치게 하는 것이다. 좋은 머리를 그냥 외우는 기계로 만들어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한다. 심지어 대학에서도 시험문제가 교과서의 내용에 있는 것이라면, 그 많은 양을 외워서 답안을 작성하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그런데 조금만 문제를 비틀어 자기의 생각을 쓰게 하면 제대로 손도 못 대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자신의 눈으로 관찰하고 자기의 판단으로 해결하는 능력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자녀들이 시대에 부응하는 인재가 되길 원한다면 자주 같이 숲을 찾으라고 권한다. 미국에서 발표된 한 연구에 의하면 숲과 자연을 즐기고 또 그 속에서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어릴 때 부모로부터 숲과 자연을 즐기는 법을 배웠다고 밝히고 있다. 많은 교육학자가 사회적인 환경은 물론이고 물리적인 환경과 교류하며 자신의 가치가 형성된다고 한다. 따라서 어릴 때 숲에 자주 간다는 것은 호기심과 창의력을 길러줌과 동시에 건강한 가치관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이나 다른 상대를 이해하고 협력하며 같이 더불어 사는 것을 배우게 한다. 숲이 살아있는 교과서이고 교실이다.

 

 


 

신원섭 라파엘 교수

(충북대 산림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