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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비담 시인 / 그해 봄에는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5.

전비담 시인 / 그해 봄에는

 

 

 목련이 조등을 켰다

 

 목련나무 아래

 함께 살자던 사람들이 사자들을 배웅했다 흰색 아니면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빨주노초파남보 시장의 패션마스크는 좀 더 있다가 나타났다

 

 아무도 서로 껴안지 않았고

 '마주앉아 훈김을 불며 붉은 육개장을 떠먹지 않았다

 

 은행이 마음을 입금하는 계좌라는 신상품을 개발하였다

 

 자살 해고노동자 추모분향소는 전염력의 상관이 있어 허가가 없었고

 자살 고위관리 추모분향소는 전염력의 상관이 없어 허가가 있었다

 

 코로나에도 코로네이션이 있나?

 목련 그늘에 앉아 갸웃거리는 고양이만

 의문부호처럼 목이 기울어졌다

 

 하여튼 함께 살자던 사자의 분향소와

 지나치게 지나치는 죽음이 만연했다

 

 목련나무 아래

 얼룩진 봄의 수의들이 한 뭉텅이씩 널브러져 갔다 왕성한 전염병처럼

 

 


 

 

전비담 시인 / 매천 황현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구나

 

백 년도 전 순절선비의 비탄이

시절의 등뼈를 곧추세운다

 

가을밤 서늘한 샘 가

야광명월 기다리던 매화 한 그루 마침내 졌다

 

국치에 물든 달의 낯빛

나뭇가지에 목을 걸었다

 

선연하다 가을 등불 아래 그 절의(節義)

붉은 낙화를 주워 꽃잎의 후기를 읽었다

 

매화는 망했어도 망국의 삼일독립만세 맹렬히 피워 올렸으나

용케 이른 해방공간에도 좌익우익 난작인간식자인*

 

부패한 선비들로 만신창이 나라

귀신의 무리 뿌리치고 낙향한 매천필하무완인*

 

백 년 전에 차오른 백 년 후

매화의 샘터가 텅 비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느낄 때

나는 이 시절의 시인이다

 

절명으로 망국의 치욕을 연명한 선비

연명으로 절명의 비분을 천명한 시인

 

목숨을 다해 시절의 수모를 책임진

 

매화의 유서를 받아들고

 

오늘

시인은 서로의 머나먼

어느 인간의 망국으로 떠나고 있나

 

* 難作人間識字人: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하기 어렵구나’라는 매천 황현의 절명시구.

* 梅泉筆下無完人: ‘매천의 붓 아래 온전한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매천은 대한제국 시기의 정치인들을 매섭게 비판했다.

 

 


 

전비담 시인

경북 점촌 출생, 영남대학교 철학과 졸업. 2013년 제8회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으로 《시산맥》 에서 작품활동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