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인 시인 / 기다리는 사람
회사 생활이 힘들다고 우는 너에게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우리에게 의지가 없다는 게 계속 일할 의지 계속 살아갈 의지가 없다는 게 슬펐다 그럴 때마다 서로의 등을 쓰다듬으며 먹고살 궁리 같은 건 흘려보냈다
어떤 사랑은 마른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는 늦은 밤이고 아픈 등을 주무르면 거기 말고 하며 뒤척이는 늦은 밤이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룬 것은 고작 설거지 따위였다 그사이 곰팡이가 슬었고 주말 동안 개수대에 쌓인 컵과 그릇 등을 씻어 정리했다
멀쩡해 보여도 이 집에는 곰팡이가 떠다녔다 넓은 집에 살면 베란다에 화분도 여러 개 놓고 고양이도 강아지도 키우고 싶다고 그러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하고 몇 년은 성실히 일해야 하는데 씀씀이를 줄이고 저축도 해야 하는데 우리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키스를 하다가도 우리는 이런 생각에 빠졌다 그만할까 새벽이면 윗집에서 세탁기 소리가 났다 온종일 일하니까 빨래할 시간도 없었을 거야 출근할 때 양말이 없으면 곤란하잖아 원통이 빠르게 회전하고 물 흐르고 심장이 조용히 뛰었다
암벽을 오르던 사람도 중간에 맥이 풀어지면 잠깐 쉬기도 한대 붙어만 있으면 괜찮아 우리에겐 구멍이 하나쯤 있고 그 구멍 속으로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다 보면 빛도 가느다란 선처럼 보일 테고 마침내 아무것도 없이 어두워질 거라고
우리는 가만히 누워 손과 발이 따듯해지길 기다렸다
―시집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창비, 2022)
최지인 시인 / 더미
1 수업을 빼먹었다는 이유로 너는 교실에서 뺨을 맞았다 담임이 출석부로 머리를 후려쳤다 네가 눈을 부라렸던 것 같은데, 학교가 끝나고 아파트 놀이터에 모여서 욕을 하고 피씨방에 갔겠지 너는 친구가 많았고 그들을 사랑했었다
나는 방송실에서 국어선생에게 맞았다 조금 우울해진 것뿐이었는데 내가 변했다고 했다 변했다고 그는, 내게 잘못이 있다고 멍이 들 때까지 몽둥이를 휘둘렀다 어쩌면 내가 이상해진 게 아닐까
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
너는 무섭다고 내게 전화했다 너와 같은 층에 살던 중년 남성이 사망했고 며칠 전부터 복도에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었는데 그게 쓰레기 냄새인줄 알았다고, 그 냄새가 잊히지 않는다고
한순간에 온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 우리는 그 무엇도 정상이 아닌 곳에 있다 그런데 정상이란 뭘까 그것은 자꾸 우리를 몰아댄다 대체 어디로, 어디로
지하실에 몇십년 된 쓰레기들이 가득 쌓여 있대 사람들이 떠나면서 버렸대 쓸모없는 것들이 숲을 이룬 거지 농담이야 정신 차리자
*
사람들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랬을 것이다 너는 목소리가 잘 들리냐고 계속 물었다
2 그만 전화했으면 좋겠어 네가 말했다 나는 공중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불운이 닥쳤을 때 누구나 구원을 바라지만
나는 무엇을 잃어버린 걸까
식탁에서 밥을 먹으며 드라마를 본다 곧 끝날 것 같은데, 너와 마주 보고있던 것 같은데 어디에 있지 난
몇편의 시와 미완성 원고 한뭉치
*
네가 쓴 책의 첫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사람을 애써 찾는 일은 옳은 일인가
*
뒤를 돌아보니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빛의 꼬리를 바라보았다
네가 살아 있을 거라고 아직은 살아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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