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최지인 시인 / 기다리는 사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8.

최지인 시인 / 기다리는 사람

 

 

 회사 생활이 힘들다고 우는 너에게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우리에게 의지가 없다는 게 계속 일할 의지 계속 살아갈 의지가 없다는 게 슬펐다 그럴 때마다 서로의 등을 쓰다듬으며 먹고살 궁리 같은 건 흘려보냈다

 

 어떤 사랑은 마른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는 늦은 밤이고 아픈 등을 주무르면 거기 말고 하며 뒤척이는 늦은 밤이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룬 것은 고작 설거지 따위였다 그사이 곰팡이가 슬었고 주말 동안 개수대에 쌓인 컵과 그릇 등을 씻어 정리했다

 

 멀쩡해 보여도 이 집에는 곰팡이가 떠다녔다 넓은 집에 살면 베란다에 화분도 여러 개 놓고 고양이도 강아지도 키우고 싶다고 그러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하고 몇 년은 성실히 일해야 하는데 씀씀이를 줄이고 저축도 해야 하는데 우리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키스를 하다가도 우리는 이런 생각에 빠졌다 그만할까 새벽이면 윗집에서 세탁기 소리가 났다 온종일 일하니까 빨래할 시간도 없었을 거야 출근할 때 양말이 없으면 곤란하잖아 원통이 빠르게 회전하고 물 흐르고 심장이 조용히 뛰었다

 

 암벽을 오르던 사람도 중간에 맥이 풀어지면 잠깐 쉬기도 한대 붙어만 있으면 괜찮아 우리에겐 구멍이 하나쯤 있고 그 구멍 속으로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다 보면 빛도 가느다란 선처럼 보일 테고 마침내 아무것도 없이 어두워질 거라고

 

 우리는 가만히 누워 손과 발이 따듯해지길 기다렸다

 

―시집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창비, 2022)

 

 


 

 

최지인 시인 / 더미

 

 

1

수업을 빼먹었다는 이유로 너는 교실에서 뺨을 맞았다 담임이 출석부로 머리를 후려쳤다 네가 눈을 부라렸던 것 같은데, 학교가 끝나고 아파트 놀이터에 모여서 욕을 하고 피씨방에 갔겠지 너는 친구가 많았고 그들을 사랑했었다

 

나는 방송실에서 국어선생에게 맞았다 조금 우울해진 것뿐이었는데 내가 변했다고 했다 변했다고 그는, 내게 잘못이 있다고 멍이 들 때까지 몽둥이를 휘둘렀다 어쩌면 내가 이상해진 게 아닐까

 

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

 

너는 무섭다고 내게 전화했다 너와 같은 층에 살던 중년 남성이 사망했고 며칠 전부터 복도에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었는데 그게 쓰레기 냄새인줄 알았다고, 그 냄새가 잊히지 않는다고

 

한순간에 온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 우리는 그 무엇도 정상이 아닌 곳에 있다 그런데 정상이란 뭘까 그것은 자꾸 우리를 몰아댄다 대체 어디로, 어디로

 

지하실에 몇십년 된 쓰레기들이 가득 쌓여 있대 사람들이 떠나면서 버렸대 쓸모없는 것들이 숲을 이룬 거지 농담이야 정신 차리자

 

*

 

사람들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랬을 것이다

너는

목소리가 잘 들리냐고

계속 물었다

 

2

그만 전화했으면 좋겠어 네가 말했다 나는 공중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불운이 닥쳤을 때 누구나 구원을 바라지만

 

나는 무엇을 잃어버린 걸까

 

식탁에서 밥을 먹으며 드라마를 본다 곧 끝날 것 같은데, 너와 마주 보고있던 것 같은데 어디에 있지 난

 

몇편의 시와 미완성 원고 한뭉치

 

*

 

네가 쓴 책의 첫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사람을 애써 찾는 일은 옳은 일인가

 

*

 

뒤를 돌아보니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빛의 꼬리를 바라보았다

 

네가 살아 있을 거라고

아직은 살아 있을 거라고

 

 


 

최지인 시인

1990년 경기도 광명 출생. 중앙대 연극학과를 졸업. 2013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시집으로 『나는 벽에 붙어 잤다』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동인 시집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가 있음. 제10회 조영관 문학창작기금 수혜. 창작동인 〈뿔〉과 창작집단 〈unlook〉에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