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정재희 시인 / 야간산행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15.

정재희 시인 / 야간산행

 

 

산은 끊어질 듯 이어진 창자 속이다

밤의 야성으로 물어뜯긴 소백산 능선

고도는 1439m, 새벽 5시는 극한의 중심

파리한 랜턴만이 유일한 시력이다

빛의 자장 안으로 자꾸 좁혀지는 가시거리

키 큰 쑥부쟁이도 순한 고라니도 복병이다

돌멩이에 부딪히는 스틱의 날카로운 촉음

발끝질척이는 어둠

찬 이슬에 처연히 젖은 짐승의 울음소리

실족을 부추긴다

해고 통지서가 덜컥 다가왔던

하루 전 장면이 앞서 간다

조난당한 내 사십대의 나날들

내가 도착할 지점이 흔들리고 있다

8부 능선을 지났는데도 정상은 아득하다

가빠진 숨소리

턱밑까지 차오르는 극단

물집이 터진 자리마다 쓰라림이 동반 된다

신발 끈을 고쳐 묶으며

고비를 끝까지 넘는다

한계 속에 던져진 이후

내가 나를 지나치게 맹신했을까

의심을 걷어내며 미명 속에서

허기진 태양이 몸을 내민다

난생처음 정면이 된다

뒤돌아보니 산 아래가 전부 신생이다

 

계간 『열린시학』 2022년 봄호 발표

 

 


 

 

정재희 시인 / 롤러브레이드의 시간

 

 

바퀴와 만나는 순간

달려야 하는 자는 가장 최적화가 된다

120mm 휠 위에 몸을 싣고

두 팔을 휙휙 내젓다 보면

열세 살은 곧 바로 열세 살을 뛰어 넘는다

무릎 각도를 접었다 펴며

멀리 다리를 뻗는다

속도는 고요 속에서 거침없이 자란다  

 

저녁시간이 다가갈수록

기다릴 사람이 없다는 생각은

뒤에 남는다

안양천 트랙 옆

물오리의 날개짓과 함께

비행이 돋아난다

토성의 아득한 고리 같은

트랙을 공전하는 소년의 방식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하며 달리다 보면

몸 안에 달아나고 싶었던 것들

한 곳으로 쏠린다

 

어둠은 알고있어도 모른 척한다

수십 바퀴를 돌아도

이탈하지 않는 구심력

공복 속에 덩그러니 놓인 채

끝까지 생각을 붙들고 있다

불 꺼진 풍경과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되새김질하고 있는 걸까

어느새 돋아난 개밥바라기

온 빛을 다해 소년을 어루만지고 있다

 

계간 『시와 사람』 2022년 가를호 발표

 

 


 

 

정재희 시인 / 압화壓花

 ㅡ 바람꽃

 

 

한지 위에 반듯이 누워있는 바깥을

아니 안쪽을 허공이 염(殮) 한다

한 줌의 햇살과 약간의 숨소리가

조문하는 가운데 몸이 단단히 고정된다

안녕 나의 뿌리들아 ,

안녕 나의 세포들아 ,

나와 함께 했던 문채들아 안녕 ,

채석강 층리(層理) 같은 두꺼운 책이 얹히고 나면

석관 뚜껑 닮은 벽돌 두어 장 더 올라온다

시간이 지나면 144

물기란 물기는 다 빠져나가고

마디마디 관절 힘이 풀릴 때

나는 나로부터 온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내게 처음 다가왔던 볕뉘와

때때로 구름과의 눈맞춤

봉오리 열고 밖을 살필 때

다가온 바람의 살결들

맨몸과 온몸이란 말을 실감했다

물관을 타고 스며든 고도(高度)

리듬을 타며 바람을 관통하게 만들었지

그때부터 들리던 씨들의 수많은 속삭임낙화를 조율하게 했었는데

이제 더 이상 올라 갈 이유도

내려갈 명분도 없는

마른 꽃의 시간

흔들림을 거두고 중심을 눕힌 채

하루 종일 사후를 예감한다

백색 향기 모두 떠난 어느 날 저녁

오래도록 덮어 두었던 봉인이 열릴 거다

이제 밀폐된 두께 속에서 1mm

나는 내내 바람의 화석이다

 

계간 『열린시학』 2021년 범호 발표

 

 


 

 

정재희 시인 / 하수도 카오스

 

 

좁은 식도를 내진하는 중이다

밤새 소화하지 못해

풀럭풀럭 토해내던

역류성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싱크대 배관을 이리저리 탐문한다

조급증을 애써 누르며

뜨거운 온수를 붓기도 여러 번

내 안 밑바닥 오기가 일어서더니

급기야 부아가 치밀어온다

전문가는 내시경을 해야 한다고 했다

직달경 탐지기가 배관 속으로 잠입하자

수많은 찌꺼기들이 머물렀던 곳

점점 더 좁혀 들어간 자리에

꽉 막힌 체증이 보인다

머리카락과 기름 덩어리가 뭉쳐

응어리가 되어 있다

그 순간 나는 왜 헤어진 당신이 떠올랐을까

수십 년이 지나도 엉킴으로 남은 사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쿨럭, 쿠울~럭

체한 것들이 한꺼번에 내려간다

그제야 아, 들리고 보인다

배관 주름을 휘돌아 스쳐가던

당신와의 명랑한 시간들

밤새 나눠 먹던 2인분의 웃음과 위로

혼자가 된 뒤에야

악취가 더 심해졌던 걸 이젠 알겠다

기름기 많은 국물은 붓지 마세요

막히면 이 속도 속이 아니랍니다

우리 이대로 함께 할 수 있을까

질문도 선언도 아닌 그때 그 한 마디가

이젠 마침내 과거형인데

아니 과거형이고 싶은데

전문가의 처방은 너무나 단순하다

 

계간 『열린시학』 2021년 범호 발표

 

 


 

정재희 시인

경북 영주에서 출생. 2021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영등포구청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