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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영미 시인 / 밥에도 표정이 있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29.

정영미 시인 / 밥에도 표정이 있다

 

 

가라앉던 어둠의 질량과

몇 끼의 권태와 시름을 섞어 밥을 짓는다

늘 눈금을 맞추어야 하는 조급함과

간간이 절여지던 눈물도 함께 넣는다

너무 되지도 않게 너무 질지도 않게

가슴과 가슴을 포개고

가라앉는 것들과 부유하는 것들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익어간다

습관처럼 타이머를 맞추며

무디어져 가는 우리

우리의 거리는 어디쯤일까

마음의 눈금 한 번 재어볼까

새어 나가는 틈에는안전밸브를 하고,

제 속을 다 끓여내 한 솥밥을 밥을 짓듯이

온전한 밥 한 그릇이 되기 위해

둥글고 모난 세월을 훌훌 섞어 볼까

모서리가 닳아 둥글어진 밥상에 앉아.

냉냉한 오늘을 비워내고

서로를 차지게 끌어안으며

경건한 밥뚜껑 위에 손을 올린다

허기를 뜨겁게 채우며

눈물 반짝이는 밥을 먹는다

 

-시집 <밥에도 표정이 있다>

 

 


 

 

정영미 시인 / 버스를 타다, 그리고 흐르다

 

 

처절하게 사랑하려고

처절하게 삶에 무게를 얹으려

떠나는 길은 아니었다

어떤 갈망이 무의식을 깨우치려함도 아니었다

채 마르지 않은 햇살을 등지고

나에게로 쉼 없이 흐르고 있는 명사들

도무지 알 수 없는 사각의 시간

그 울렁이는 깊이 속으로

열 개의 감정을 밀어 넣으면

결코 놓지 못할 실 금 같은 상처들이

너겁이 처럼 떠올랐다

와락 태풍처럼 달려 들어 목숨을 가두어도

때론 정점에서도 멈추지 못할 두 바퀴가 있어

태연히 지나쳐야 할 길이 있거늘

나를 닫는 저 육중한 문 틈 사이로 울리는 울림

-두어라 그냥 흐르게 두어야 할 일이다

 

 


 

정영미 시인

1963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세종대학교 지리학과 졸업. 서울문화예술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2년 《미네르바》 등단. 시집 <밥에도 표정이 있다>. 동서문학상 수상. 현재 문협, 미네르바작가회, 동서문학회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