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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보영 시인 / 기억과 수감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0.

문보영 시인 / 기억과 수감자

 

 

밤, 퍽퍽해

돌아누운 사람의 등처럼

  

창문은 안도하는 표정과 뜯어말리는 표정이 같았다

  

밤에 관해서라면

밤의 내부도 외부도 아닌 곳에서만 잠든다

  

아까시가 자랐다

 

창문은 커졌다

너무 큰 창문을 보면

철창을 죽죽 그어주고 싶지

 

그러면

철창을 붙들고 놓지 못하는 수감자가 생길 것이고

 

내가 병드는 것과

너의 동의가 무관하듯

식물들이 밤에만 자랄 것이고

 

아까시가 자랐다 밤에

 

창문과 너는 융통성이 없어

한번 보여준 것을 끊임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나는 뭐든 잘 잊지 못한다

 

밤이

창문을

돌아누운 너를

식탁보에 내린 어둠을

누그러뜨리는 동안

 

창문의 내부도 외부도 아닌 곳에서만

나는 창문을 기억했다

 

옆에 없는 사람이 깰까 웅크려 잔다

어딘가의 안에서 지나가는 내가 보인다

 

 


 

 

문보영 시인 / 횡단보도 앞에서

 

 

 애인과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나 방금 영감이 떠올랐어.” 나는 옆에 있는 안경점을 보며 말했다. “뭔데?” 애인이 물었다. “세상의 모든 가방이 트렁크인 거야. 다른 형태는 없어. 지난번에 여기 같이 서 있을 때, 저 안경원에 들어가던 사람 있잖아. 안경점 밖에 캐리어를 덩그러니 두고 들어갔던 거 시억나? 갑자기 그게 떠올랐어” “그 트렁크가 우리 것도 아닌데 괜히 불안했잖아” 애인이 웃으며 화답했다. “방금 머릿속에서 쓴 시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트렁크를 들고 다녀. 출퇴근길에도 트렁크를 들고 다니고, 등산을 갈 땡도, 수영장에 갈 때도, 강아지를 산책시킬 때도 트렁크를 들고 다녀. 그 세계에는 주머니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짐을 들더라도 트렁크가 필요해. ” “오” 신호등 불빛은 여전히 빨간 불이었다. 우리가 헤어지는 곳은 늘 이 앞이다. 나는 애인을 이곳까지 바래다주며, 그가 횡단보도를 다 건널 때까지 손을 흔든다. 헤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관찰할 거리가 많았고, 그 덕에 나는 기괴한 시도 쓸 수 있었다. “아, 결혼식 갈 때랑 장례식 갈 때도 트렁크를 들고 가야돼. 검은색이어야 하고. 그건 기본이지. ” “그런데 그런 세상을 왜 만드는 거야?” 애인이 물었다. “뭐긴 뭐야 세상의 평호를 위해서지.” 나는 말하며 신호등을 가리켰다. 애인은 다음 데이트도 기대된다고 말하며 미소 짓고는 꼬리 달린 동물처럼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오늘도 애인을 보내주었다.

 

 


 

문보영 시인

1992년 제주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2016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책기둥』 『배틀그라운드』와 산문집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 『준최선의 롱런』이 있다. 2017년 제36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