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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은옥 시인 / 어성전의 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0.

이은옥 시인 / 어성전의 봄

 

 

적송과 잡목이 어울려, 몇 겹의 산봉우리가 되고

마루 끝에 서서

잘 보이는 앞산부터 산의 허리를 센다

겨울 내내 쌓여 있던 눈이 아래 마을부터 녹기 시작하여

산 밑에 있는 기와집 근처 응달까지, 길어진 해 그림자가

봄을,

마당까지 실어 나른다

서서 말라버린 국화밭에도 햇살이 옮겨 다니면서

겨울의 냄새를 말린다

겨울 내내 눈 속에 파묻혀 있던 국화밭이 밭고랑을 드러내고

 

강이 얼 때부터 녹기 시작할 때까지 마을은 고요하다

나는 고요하다

고요가 고혹적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봄,

강이 뚜껑을 열고

고기들이 알을 까고 돌 밑에 집을 만들 것이다

산을 끼고 도는 어성전의 강, 강물의 흐름이 좋고 조용하여

고기들이 많이 사는 강, 사람들은 이 마을을 어성전이라 한다

바다는 바다 사람들의 밭이라면 강은 고기들의 밭이다

아침 안개가 지나갈 때는

이곳 마을 사람들의 옷에서 강 냄새가 난다

가끔씩 마을은 안개에 푹 잠겨 있고

새벽, 닭이 한집 한집에서 울기 시작해

온 동네는 조그만 소리들로 하루가 시작된다

방문을 열면 안개가 먼저 들어온다

햇살이 온 마을에 퍼지면 나는 마음을 서두른다

봄, 햇살이 동반하는 이 나른한 계절은 앉아 있기도 불안하다

겨울 내내 쉬고 있던 농기구들이 하품을 하고

아버지는 먼 산에서 해온 물푸레나무 자루를 다듬어

건넛마을에 쟁기를 벼리러 간다

아버지는 조율사처럼

호미 자루며 도끼 자루 괭이 자루를 다시 갈아 끼운다

농기구들은 아버지의 건반이 되어 사계가 시작된다

나는, 슬그머니 강으로 나가본다

강은 아직 고요하다

강은 누가 먼저 알을 낳았다고 소리치지 않는다

 

*어성전漁盛田 :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어성전리 마을

 

-199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은옥 시인 / 일상의 미학

 

 

 자정, 지하철 신림역 청소부들이 고무호스를 들고 바닥 청소를 했다 사내는 신문지 한 장을 깔고 섬처럼 앉아 있다 지하, 계단에서 여자가 개를 세고 있다 여자는 팔리지 않은 개들의 목덜미를 잡아 상자 속에 넣었다 지상, 가로등 아래 남자가 토끼를 펼쳐 놓고 성경을 읽고 있다 머리통에서 검은 먹물이 흘러나왔다 어두운 골목길 전봇대처럼 평범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밤마다 사막의 선인장들이 도시로 공수되었다 묘지 위로 재즈는 어둠을 몰고 왔다 사내는 양손에 저울을 들고 다리를 건넜다 물속에 달이 빠졌다 물 위로 바람이 불었고 달빛은 바람에 날렸다 바람이 점점 심하게 나무를 잡고 흔들었다 나무가 뿌리째 뽑혀 하늘을 날았다 사내의 모자는 바람에 날려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고양이는 나무뿌리를 잡고 지붕에 떨어졌다 사람들은 개를 한 마리씩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은옥(李銀玉) 시인

1959년 강원도 삼척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9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어성전의 봄> 당선. 시집으로 『나에게는 천개의 서랍이 있다』가 있음. 현재 <梨梧里>란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