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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증식 시인 / 가장노릇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3.

고증식 시인 / 가장노릇

 

 

식구들 앞세워 외식 나온 길

아내는 횟집으로 가자 하고

아이들은 고기를 먹자 하고

나는 그냥 말없이 웃고 섰다

아이들 따라 돼지갈비를 먹는데

동해바다 등푸른 파도 소리

아내 눈에 떠날 줄 모르네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은 택시를 타자 하고

아내는 별이나 보며 걷자 하고

나는 그냥 또 웃고 섰는데

쉬엄쉬엄 내딛는 걸음마다

쫑알쫑알 아이들 소리 묻어나네

얼마 만인가 우리

알싸한 강바람에 녹아들며

노래까지 한 자락 흥얼거렸는데

현관문 들어서자 후닥닥,

식구들은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고

빈방에 고여있던 낯선 어둠이

다시 나를 떠메고 가는 것이었다

 

 


 

 

고증식 시인 / 그나저나

 

 

불쑥 전화 온 어릴 적 고향 친구

애들은 뭐 하냐 묻길래

그냥 뭐 알바 비슷한 거 한다니까

요즘 애들 참 다들 왜 그러냐고

우리 애는 유학 가서 자리 잡았다고

그나저나

선생은 언제까지 할 참이냐 묻길래

올까지만 하고 명퇴할까 한다니까

뭐 한다고 나오냐고 평교사 아니냐고

아무리 그래도 교장은 하고 나와야지

그냥 교사를 누가 알아주냐고

니 마누라도 그냥 선생 아니냐 물으니

넌 남자 아니냐고 여자랑 같냐고

그나저나

요즘도 시는 쓰냐 묻길래

안 그래도 엊그제 시집이 나왔는데

주소나 좀 불러주라 했더니

됐다고, 너도 다 생각 있어 내겠지만

요새도 시집 읽는 사람 있긴 있냐고

그나저나

시집 내면 돈은 좀 되냐고

그 동네서 알아주긴 좀 알아주냐고

그나저나 바빠서 그럼 이만 끊겠다고

 

([현대문학] 2019.09)

 

 


 

고증식 시인

1959년 강원도 횡성에서 출생. 충남대학교 국문과 졸업. 1994년 『한민족문학』 4집으로 시문단에 나옴. 시집으로 『환한 저녁』, 『단절』, 『하루만 더』, 『얼떨결에』. 시평집 『아직도 처음이다』 등이 있음. 1988년에 밀성제일고 재직 중. 밀양문학회장, 한국작가회의 이사 등을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