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증식 시인 / 가장노릇
식구들 앞세워 외식 나온 길 아내는 횟집으로 가자 하고 아이들은 고기를 먹자 하고 나는 그냥 말없이 웃고 섰다 아이들 따라 돼지갈비를 먹는데 동해바다 등푸른 파도 소리 아내 눈에 떠날 줄 모르네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은 택시를 타자 하고 아내는 별이나 보며 걷자 하고 나는 그냥 또 웃고 섰는데 쉬엄쉬엄 내딛는 걸음마다 쫑알쫑알 아이들 소리 묻어나네 얼마 만인가 우리 알싸한 강바람에 녹아들며 노래까지 한 자락 흥얼거렸는데 현관문 들어서자 후닥닥, 식구들은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고 빈방에 고여있던 낯선 어둠이 다시 나를 떠메고 가는 것이었다
고증식 시인 / 그나저나
불쑥 전화 온 어릴 적 고향 친구 애들은 뭐 하냐 묻길래 그냥 뭐 알바 비슷한 거 한다니까 요즘 애들 참 다들 왜 그러냐고 우리 애는 유학 가서 자리 잡았다고 그나저나 선생은 언제까지 할 참이냐 묻길래 올까지만 하고 명퇴할까 한다니까 뭐 한다고 나오냐고 평교사 아니냐고 아무리 그래도 교장은 하고 나와야지 그냥 교사를 누가 알아주냐고 니 마누라도 그냥 선생 아니냐 물으니 넌 남자 아니냐고 여자랑 같냐고 그나저나 요즘도 시는 쓰냐 묻길래 안 그래도 엊그제 시집이 나왔는데 주소나 좀 불러주라 했더니 됐다고, 너도 다 생각 있어 내겠지만 요새도 시집 읽는 사람 있긴 있냐고 그나저나 시집 내면 돈은 좀 되냐고 그 동네서 알아주긴 좀 알아주냐고 그나저나 바빠서 그럼 이만 끊겠다고
([현대문학] 20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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