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리 시인 / 순筍 엄나무야 어금니를 물지 않고 모음만인 듯 입을 다물면 귀가 밝아져 수천 마리 새가 일제히 부리를 닫고서 바람에 씨가 날아와 저절로 태어난 나무라는 얘길 들었지 가시가 아픈 자리에서 나무는 시작된다 첫발을 떼고 건들거리는 통나무다리 앞에 주저앉아 주저하는 발끝 허공은 허술해 두려움으로 컹컹 먼저 짖는 개처럼 전체가 깨진 걸로 덮여 있는 액정이 있었다 맨발로 밟으면 개울물은 흘러오되 도착하지 않는 방식으로 밀고 나온 뼈가 나무껍질 위로 솟아 숲속 최초의 발성, 엄 달 속에 찔러 넣자 명명백백 비탈을 지켜내는 저 얼굴을 보겠다
정재리 시인 / 드로잉을 위하여 ㅡ1분 크로키
옷을 다 벗고도 더 벗을 무엇이 남은 듯한 저 포즈 고양이처럼 점점 교묘해지네 멀어지면 안 되고 닿을 수도 없는 벗은 몸과 입은 몸이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대에겐 야옹야옹 맘껏 울 허공이 필요해 돌연 날아와 꽂히면 꽃 잘 보면 나무 목탄은 분명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고 따듯한 감촉 아, 어디서 왔지 목을 돌린 1분 먼저 간 그대에겐 우아한 시간 허겁지겁 포즈를 핥으며 뒤쫓는 나는 손이 떨리고 백 개의 시선에서 도망치는 우리 이목구비는 빠르게 생략하자 달리는 맨발이 덧칠에 걸릴 때 조용히 조명이 꺼지고 검은색의 속내를 아는가 타버린 시간 화살나무의 소신공양을
-2017년 ≪서정시학≫ 등단시
정재리 시인 / 캔버스
나는 오른팔을 들어 가로선을 주욱 그었다 이건 지평선이야 조금씩 흘러내리는
너는 지평선 위를 걸어가는 한 사람의 옆모습을 스케치하고 있다 수평으로 날리는 긴 모자 끈과 작은 얼굴 아래 풀어헤친 셔츠를 지나
한 방향으로 부는 바람과
나는 또 지평선 너머를 생각하고 있다 그곳은 홍골인엘스 노래하는 모래라고 했지 노래하는 모래라니 노래하는 뜨거운 목구멍처럼 쑤욱 빠져들던 맨발
어느새 맨발을 그리고 있네 너는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가기엔 20호는 너무 작고 간지러워
그날 모래산 아래 벗어 둔 신발이 없어진 건 바람 따라 산이 이동하기 때문인 걸 알아?
사진보다 보폭을 작게 그려 놓은 게 마음에 걸리지만 내색하지 않고 너의 두터운 손가락과 섬세한 표현이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지 얘기하며 함께 웃었다
나의 단순한 지평선이 멀리 나가 수평선이 되면 좋겠다는 말은 속으로 했다
일렁이는 은빛 꽃가루 그런 바람만으로도 어쩐지 물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낙타처럼
나는 라커룸 문을 열고 100호를 찾고 있다 -시집 『흰 바탕에 흰말은 무슨 색으로 그리나요』(파란, 2022)
정재리 시인 / 소묘
단순한 음률이 반복되고 있어요 포유강 우제목 기린과 기린속 기린 기린의 걸음걸이는 지그재그
울지 않는 그의 성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아카시아나 미모사 잎을 먼저 그려 놓을 조금 긴 종이가 필요합니다
간격이 필요합니다
콩테 목탄 흑연을 나란히 놓습니다
목탄 흑연 콩테로 순서를 바꿔 봅니다 검정으로 긴 속눈썹의 속까지 눈을 감았다 떠도 얼룩무늬 패턴은 전히 먼 나라
마르는 입 마른 잎 마른 손
어떤 울음은 끝내 지울 수 없고 지우개는 마지막에 한 번 쓴다고 알려 줍니다 마지막이란 말에 잎사귀는 온통 귀가 돼 버리겠죠 하얘지는 귀
예전엔 잘 머금고 잘 뱉는 큰 붓이 있었어요 물은 알아서 번지고 흐르니 마르기 전에 마음껏 색을 섞도록 해 그랬었는데
기억은 건기를 견디게 하고
바람이 지나가고 한참 뒤 툭 부러지는 나뭇가지 시집 『흰 바탕에 흰말은 무슨 색으로 그리나요』(파란, 2022)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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