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운 시인 / 여름 정원 날 풀린 토성공원 벤치에 모여 할머니들이 두런두런 이야기 꽃을 피운다 노점에서 열무 팔아 딸 셋을 대학 보냈다는 일산댁 기구에 올라 남이섬 향해 페달을 밟는 춘천댁 하나같이 시선이 하늘 중간쯤에 닿아 있다 누군가 일산댁하고 부르니 엄마가 돌아본다 어서 와 하며 잇몸 드러내고 웃을 때는 무너진 흙담 같은 이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장미 향이 났다 “식사하세요” 아쉬운 듯 엄마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한 끼 때웠는데 뭐가 이리 많은지 혼잣말을 뒤로 한 채 설거지를 시작한다 뭔가, 거품 속에서 쿡 찌르는 것 엄마가 소중히 여기는 장미 정원 그려진 접시 귀퉁이가 깨져 있었다 어디에 부딪혔을까 버릴까 했지만 버리지 않았다 아들 낳은 여자 속옷을 구해 입던 엄마의 믿음처럼 그래야만 엄마가 오래오래 곁에 계실 것 같았다 접시를 조심스레 닦아 건조대에 올린다 뚝. 뚝. 물 떨구며 제 몸보다 큰 몸을 층층이 지고 있다 커다란 열무 보따리 이고 집을 나서던 엄마를 닮았다 새벽 버스 기다리며 허공의 난간에서 몸 말리는 잠깐이 한숨이었을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 가로등 하나 없는 밤길을 보따리 가득 짤랑대는 빈 숟가락 이고 재촉했을 장미 만발한 뜰 안에 무얼 담고 싶었을까
뜨거움과 차가움을 견딘 몸에 간 실금들 구석구석 마른 수건으로 마르지 않은 물기를 닦아낸다 이 빠진 자리를 스칠 때마다 손이 멈추었다 떨어진 꽃잎 하나가 멀리 계절 밖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로운 시인 / 푸른 커튼 뒤에 있었다
#식탁 흰 천이 펼쳐져 있었다 어른들이 아프간 전쟁 이야기를 하다 다투기 시작했다 고기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천 위로 번졌다 난 그만 씹고 있던 고기를 뱉어버렸다 아버지는 식사 예절이 없다며 매질을 했다 전쟁은 끝날 줄 모르고 원피스 아래 멍 자국은 깊어갔다 #침대 붉은 식탁보에서 시작되었다 얼룩진 유년의 잔상은 침대 밑에서 웅크리고 잠드는 날들은 잠드는 것과 죽어가는 것이 뒤엉킨 방 핏방울이 들이쳐 이불이 온통 붉게 물들고 검붉은 반점이 살아나 꿈틀대는 꿈을 꾸었다 비명 지르며 깨어날 때마다 주문을 외웠다 괜찮아 괜찮아 자고 나면 다 잊힐 거야
#창 전쟁은 끝났을까 깨어났지만 일어나지 않았 다감은 눈에 떠다니는 빛이 유령 같아서 다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지금쯤 엄마는 붉은 고기를 신경질적으로 썰고 있을 것이고 아버지는 뉴스를 보며 미간을 찌푸릴 것이다 식탁보는 바뀌었을까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지만 방에서 나가지 못했다 창백한 창에 비치는 오늘이 푸르렀다
#거리 이웃들은 나를 작은 천사라고 불렀다 희미해지면 아름답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멍 지운 하얀 피부가 순결했다 기억되는 것처럼 희미해져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천사임을 잊어야 살아낼 수 있는 것처럼
창틀에 끼인 비명이 덜컹거리고 있었다. 푸른 커튼 뒤에서
이로운 시인 / 스타킹을 신고
목이 긴 하루를 신고 나왔어 처음부터 구멍이 나진 않았지 갈라진 뒤꿈치가 한껏 탱탱해진 탄성을 물더니 올이 나가고 바닥이 드러났어 손가락을 넣어 튕기면 위로 곧은 길이 펼쳐지지 올곧은 길은 너무 쉽게 끝이 보여 차라리 구멍 난 틈으로 숨 쉬며 굽은 길을 돌아가는 게 나을지도 몰라
가끔, 길을 걷다 낯선 골목 끝에 이르고 심장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짙은 어둠이 내릴 때느 닷없이 부는 바람은 뼛속까지 구멍을 내기도 하지 거슬러 되돌아가는 길을 두리번대지만 현재의 기억은 늘 과거의 기억에 불친절해 궁상맞게 골목 귀퉁이에서 올 빠진 기억을 홀쳐매고 있는 내가 보이곤 해 그래서 이번엔 성긴 하루를 신고 나왔어 내 각선미 쪽으로 길게 당겨진 골목이 아마 세상에서 가장 질기고 뻔뻔한 골목일 거야 불온한 눈빛을 기대하는 건 어제의 어긋난 굴절
깊은 밤 문득 내일이 걱정될 땐 돌돌 말린 하루를 펴며 또 하루를 부탁하지 얼룩진 바닥을 헹궈내면서 흠뻑 젖은 오늘을 털어대면서
덜 마른 하루를 신고 나왔어 나의 따스한 체온이 스미고 있어
이로운 시인 / 해부학 실습
시베리아 시베리아 하면 시린 바람이 부는 것 같아 지도를 펼치고 눈 덮인 광야를 달리지 검지 끝이 시려 자꾸 딸꾹질이 나와 딸꾹 딸꾹 차창 안의 너는 시린 침대칸에 누워 있지 벌목된 자작나무처럼 철로를 따라 멈춘 채 오지
실습이 시작되었어 기억 깊숙한 곳에서 너를 만났지 나는 푸른 가운을 입고 너는 흰 천을 덮고 상기된 얼굴로 내 옷의 단추를 모두 채웠어 너를 만지는 나의 손은 청결하였고 어느 시간을 떠돌다 창궐한 주검으로 기증된 거니? 너의 죽음을 내 마음속 냉동실에 보관하고 해부해 보곤 했어 천을 들치자 나는 경직된 시간의 냄새 파리한 네 몸에 메스 대는 나의 행위는 정당한 것일까? 빠져나가지 못한 날들이 응고된 네 심장을 보면서 가슴 뛰던 날을 상상하는 건 실습의 금기라서 *카데바의 눈과 마주치는 건 절대 금기라서 눈 맞춤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어 녹아내리는 시간 더는 해체될 수 없는 조각들을 수습해 이 문 나서면 몸에 밴 냄새에 한동안 식욕을 잃겠지만 이내 빈속 채우기 갈급해질 거야 *인간의 생명을 존중히 여기겠노라 오늘도 선서를 외워 세탁된 가운은 눈부시지 내 앞에 환부를 드러내는 이들 도려내는 칼끝은 무뎌지고
야로슬랍스키를 떠나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야로슬랍스키를 떠나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츄 츄우 츄 츄우 너는 끝없이 떠돌지 적막한 밤 소리는 더 선명해지지
영원 하자던 약속을 지키려는 거니? 아직도 내 기억의 은빛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너 원치 않는 기증으로 해체되는 건
포르말린 냄새 가득한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여전히 나는
*카데바 : 해부용 시체를 뜻하는 의학 용어 *히포크라테스 선서 중에서 발췌 2022년 《시와 경계》 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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