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정 시인 / 오래된 끝에서
흘러넘치듯 능소화가 담벼락에 매달려 있다
열매는 꽃에 매달리고 꽃은 줄기에 매달리고 줄기는 뿌리에 매달린다 뿌리는 지구에 매달려 있고 지구는 우주에 매달려 있다 매달린 것을 잊고 매달려 있다
산다는 것이 매달리는 것일까 저 여자의 가슴에 젖이 매달리고 등에 아이가 매달리고 팔에 장바구니가 매달리고 장바구니는 시장에 매달리고 저 여자는 집에 매달려 있다
손가락은 카톡에 매달려 있고 수많은 당신에 매달려 있다 당신은 씨줄과 날줄, 그물에 매달려 있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오래된 슬픔이 묻어난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핏방울이 맺혀 있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굴욕의 기미가 있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솟구치다’의 그림자가 매달려 있다 그 끝에 거꾸로 솟은 종유석이 자란다
매달리는 것은 추락을 견디는 것 오래 바람을 견디는 것 길게 휘어지는 촉수를 말아 안고 잎사귀 뒤 나뭇가지 끝에서 잠을 청한다
-시집 『뱀파이어의 봄』에서
우남정 시인 / 풍장(風葬)
김장철이 시작된다 동치미용 무를 다듬는다 무청이 흩어지지 않도록 밑동을 넉넉하게 남긴다 그것을 겨울바람에 걸어놓을 것이다 배추 절인 소금물에 살짝 숨 죽인다 간기가 바스러지는 슬픔을 견디게 할 것이다
겨우내 베란다 줄에 매달린 무청은 잊는다 그가 열흘쯤 입원했고 치매를 앓는 어머니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폭설이 서너 차례 내렸고, 한강 하구에는 유빙이 떠다니고 있었다
어느 저녁, 바짝 마른 무청에서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대한을 지나 입춘쯤이었을까 시래기는 죽은 새처럼 말라비틀어졌다 껍질과 힘줄만 남았다 날개가 바스라질 것 같다 허기가 바람 소리를 불러왔다
따뜻한 물에 죽은 새를 담근다 갈변한 핏물을 토하며 부풀기를 기다린다 피가 돌고 살이 되살아나기를 기다린다 살과 뼈가 부드러워진다 물을 바꾸며 겨울을 우려낸다 오래도록 삶아낼 것이다
새여, 새여, 날아라, 날아라
검푸른 시래기죽으로 뱃구레를 불린 청둥오리 떼가 일제히 날아가고 있다
-시집, <뱀파이어의 봄>, 천년의시작,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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